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淡 담
앵커 1

담淡/憺, 백색미감

“한국미란 차분히 머금는, 슬프지만 따스한 백자의 마음이다.” - 김미경

흰 바탕의 스퀘어(square)가 화면 전체를 머금은 그림, 심상의 경험을 그린 라이프 퍼포먼스(Life Performance)의 구현, 김미경의 작품들은 다양한 세상을 껴안은 ‘어머니의 마음’과 닮았다. 삼베나 모시의 겹을 보듯 스미듯 이어지는 동력은 백색 미감 안에 숨은 스퀘어의 덩어리들이 미묘한 마법을 부리는 것이다. 이러한 담(淡)의 정서에 대해 비평가 민병직은 “지극히 풍부하고 충만한 것을 최소한의 것으로 담아내는 역설의 미학”으로 풀이한다. 맑디맑은 외연의 담(淡)과 고요한 마음을 머금은 내면 담(憺)은 보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다층의 레이어를 머금고 우리의 마음을 치유한다.

담대한 마음 안에 숨은 격자의 가능성

한국의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1912~2004)에 비유할 만큼, 초기 작업들은 어머니의 보자기에서 영감을 얻은 지극한 모성애로부터 출발한다. 평생 세 자녀를 키운 어머니의 마음을 하나-둘-셋 헤아려 보면서 복합적인 시간의 축적에 따라 사유의 깊이를 가져가는 퍼포먼스 식 작업을 이어온 것이다. 작가는 오른손-왼손이 연결된 작업을 통해 ‘외연(淡)과 내면(憺)의 조화’를 좇는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한 삶의 부질없음을 견고한 의미로 뒤집는 작가의 에너지는 백자의 균열된 유약들이 전체의 베리에이션을 만드는 효과와도 연결된다. 긴 유학 생활 뒤 인사동에서 발견한 조각보 속에서 여러 사람의 역사를 발견한 것처럼, 작가는 구겨진 마음을 펴는 행위로서 그리드를 세우고 이를 하나-둘 연결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작가에게 작업은 울퉁불퉁한 마음들의 잇거나 쌓는 과정이다. 백색 안에 감추거나 올린 마음의 세포들이 그리드로 연결됐을 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여러 감정들이 함축적으로 치유되는 희망의 미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리드를 일상의 여러 경험들로, 색의 베리이션을 한국적 마음들로 해석한다. 수직 기둥과 같이 솟아오르는 에너지들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나무가 많은 한국 자연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결이 층과 만나 작품이 되고, 감상의 경험이 더해져 작품이 완성된다.

작가는 백색 미감 아래 놓인 다층의 레이어를 좇아 기억을 하나의 인셉션(Inception) 처럼 나열한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감각이 멈추듯이, 내 안에 퍼진 작은 떨림들이 모여 처음 느껴보는 나와 만난다. 작가는 꿈처럼 보이는 경험 하나를 내놓았다. 어느 날 본 수족관의 투명 물고기는 척추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자신의 인생을 선명하게 펼쳐 보여주었다. 작가는 작품이 무한대로 펼쳐진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를 바란다. 마치 무명의 사람들이 쌓은 희망의 돌탑과 같이, 그리드를 쌓는 행위 속에서 ‘고통이 무화(無化)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공들이 청자를 만들 때 하늘을 담고자 했듯이, 세상의 다양한 삶들을 숙고(Contemplate)하면서 작업하는 과정은 땅의 기운에서 하늘의 마음으로 다가서게 하는 그림을 창출한다. 김미경의 작업행위는 색이 있음에서 색이 없음으로 나아가는 과정,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언급한 ‘공과 색의 연동(空卽是色 色卽是空)’을 보여준다.

다양한 삶을 껴안은 백색의 마음

작가는 한국미에 대해 ‘포용과 수용’을 이야기한다. “한국미란 조용히 품어 안는 은은한 아름다움, 스며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가능성의 미감이다. 내가 모티프로 삼는 그리드는 펼치면 단순하지만, 감싸 안으면 대상을 그대로 포용하는 보자기의 담대함과 같다. 시간이 흘러도 질리지 않고 멋스러움이 더해지는 그런 보편적 아름다움(美)을 담아내고자 한다.”

멀겋게 칠해진 흰 캔버스 사이로 희미하게 올라오는 격자무늬들은 흡사 삶을 써 내려간 원고지를 연상시킨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추상작업 사이로 우리의 삶이 스쳐가는 까닭은 그리드 사이로 보이는 미세한 색의 에너지가 자연의 광활함을 담기 때문이다. 단순한 패턴의 반복이 아닌, 한국의 색을 연상시키는 가슴 저미는 뭉클함, 이는 맑디맑은 평온함(淡/憺)에서 오는 김미경 그림만이 줄 수 있는 무한한 깨달음의 영역일 것이다. 작가의 그림들은 그리는 행위가 어떻게 숭고함을 자아낼 수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차가운 균형이 아니라, 한국미에 바탕 한 담대한 정신성을 단련된 손길로 담아낸 심오한 아름다움의 경지인 것이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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