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흰 : 행위와의 대화

 

최병소(Choi Byung So), 제여란(Je Yeo Ran), 박기원(Park Ki Won)
검은, 흰 : 행위와의 대화

이 전시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되 반대 얼굴을 가진 ‘검은 흰’을 바탕으로 최병소, 제여란, 박기원으로 이어지는 ‘작업행위’를 미학적 대화로 풀어낸 전시이다. ‘검은 흰’은 색(色)의 기본을 밝히는 형용사로, 동양미학으로 풀자면 채우고(玄)과 비운(餘白) 상생(相生)의 가능성(飛白)을, 서양미학으로 풀자면 시작과 끝을 머금은 조화로운 질서(universe)를 상징한다. 검은 흰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예술가의 고뇌에서 시작해 행위의 기본을 좇는 끊임없는 도전이자 ‘진정성 있는 예술가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 「우울」(Spleen)에서 고뇌의 모습을 “밤보다 쓸쓸한 검은빛 … 푹 숙인 제 머리에 검은 깃발을 깊숙이 꽂는” 고독한 평등의 모습으로 표현한 바 있다. 검은(玄)의 ‘웅변적인 냉담’은 역설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단순히 존재하나 주변을 평등한 아름다움으로 이끄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깊이 있는 멋을 드러낸 ‘검은 미학’과 이를 뒷받침하는 ‘흰여백’의 힘은 “깊이 있게 공존하되 서로에게 평등한 예술 행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검은 흰은 ‘비우고 채운 허실상생(虛實相生)’의 작가정신을 보여준다. 이 전시는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은 작가들 사이의 애정 어린 응원이 만든 오랜 교류의 결과이다. 작은 전시지만 이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진정한 교류와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다. 대범한 독창성을 예술 행위로 풀어낸 3인의 진정성 있는 작가들을 통해 ‘검은 흰’이 의미하는 오늘의 시대인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들은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는다. 집요한 작가정신을 갖춘 강한 내적 공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 미술평론가 류병학(Ryu Byung Hak)


최병소 평론
균형과 근본을 향한 회화적 긋기

검은 흰, 행위와의 대화. 어찌 보면 이 전시의 제목은 검은 긋기 사이에 개입된 묘한 여백을 읽는 ‘최병소’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수식어 같다. 우리는 그의 노동집약적 예술 행위에서 숨이 멈추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얇아질 대로 얇아진 닳아서 찢긴 형상들은 바닥까지 경험한 인간존재의 허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예전 전시에 동행했던 한 인류학자는 최병소의 작품을 보고 “불에 타 재가 되어 버린 바스라진 고대문명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평했다. 1943년생, 이미 여든에 다 달은 작가는 한국전쟁의 참혹함, 70년대 유신체제의 감시, 퇴폐풍조가 유행하던 시기의 현실 속에서 권위에의 저항을 지우는 행위로 극복해왔다. 다양한 실험미술을 거치면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와 하나의 방법론으로 평생을 일관해온 것은 시대정신을 자신의 행위성과 일치시켜온 까닭이다. 이런 작가에겐 그 어떤 유행이나 사회적 사건들이 작품세계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극대화된 반복행위를 일상의 오브제 위에 그어낸 은둔하는 작가, 우리는 하나의 방식을 고수한 최병소 작가에게 하나의 의문점을 갖는다. 왜 하나의 방식을 고수했을까. 대구미술계의 거장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일컬어 왔지만, 이미 최병소는 동시대 한국 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꼽힌다. 신문을 덧칠하거나 연필 볼펜 등으로 그으면서 얇은 종이의 두께에 개입하는 행위는 오랜 기간 자신의 심상과 마주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한때 단색조 회화로 분류되었지만, 하나의 사조로 설명하기엔 행위하는 동시에 존재가 되기에 ‘최병소만의 장르’로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그가 현대미술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지점은 어머 어마하다.

전시를 위한 인터뷰에서 딸인 최윤정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버지는 평범함을 중시하는 겸손함을 갖췄다. 항상 책을 읽고 공부하는 열정이 있다. 부풀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대로 보여지기 바라는 성실함을 추구한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할 수 없는 70년대부터 이어온 작업, 세계 어디에도 없는 철학적인 사유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박기원, 최병소를 말하다.
측면에서 보면 1미리도 안되는 얇은 신문지 작업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스쳐가는 영감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제여란 작가와 비교하면 한 명은 북극 한 명은 남극을 향해 가듯 다른 느낌이지만(각기 다른 작업방식을 고수하지만), 언젠가 만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서로 다른 사연으로 어딘가를 헤매지만, 이 전시를 통해 만나는 새로운 경험들이 참 소중하다.

제여란, 최병소를 말하다.
인품이 점잖은 좋은 작가이다. ‘반복과 변화(되풀이)’를 토대로 한 작업들은 삶과 작업의 분리가 불가능하다. 동작의 재빠름과 만난 검정 빛은 긋기를 통해 공간이 뚫고 일어나는 수직성을 획득하면서 마침내는 물성 변환에 이른다. 시간의 겹이 풀어내는 여백과 환기는 작품에 집중하게 하는 기묘한 에너지를 지녔다. 작품과 자신이 일체화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지 않는 (언어화 시키지 않는) 방식은 오로지 긋기, 표면과의 대화를 통해 대결구조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제여란 평론
무한의 가능성을 그리는 에너자이저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제여란은 역동적인 행위성을 통해 표현과 재료에 강한 에너지를 남기는 작가이다. 이른바 에너지 페인팅, 시·공간의 궤적을 계획 속의 무계획 속에서 남기는 ‘행위 추상의 대가’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석도(石濤)의 일획론(一畵論)을 연상시키는 강한 붓질(變化-劃), 마음과 사물 사이의 거리낌 없는 심안(心眼), 그림 전체에 넘치는 개성어린 품격은 제여란 만의 심상이 독특하게 펼쳐진 세계이다. 한강의 소설 ‘흰’을 연상시키는 작업들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가 없는” 흰 것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로가 섞일 수 없는 검은 깊이와의 만남에서도 ‘흰’은 절대로 자신의 에너지를 굽히지 않는다. 이렇듯 검은 흰은 다른 색과 달리 경계없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우상화를 거부한 검은 흰의 자유처럼, 작가는 스스로가 우상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상으로부터 자유롭기. 불안이란 동요 그 자체를 깊이 파 들어가 맘껏 휘저어 끌어내어 보기” 어쩌면 작가노트에 담긴 자기와의 약속들이 진정한 창조의 길로 향하는 가능성으로의 여정이 아닐까.

제여란은 색을 잘 운용하는 작가이다. 선과 색의 구조를 통해 전경(傳經)과 측면을 융합하면서도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과 물성의 대화를 조감(鳥瞰)하듯 읽어낸다. 동양산수화에 곽희(郭熙)의 삼원법(三遠法; 高遠-平遠-深遠)이 있다면, 작가는 다차원의 심층구조를 내면 안에 담아 형상화의 원칙에서 벗어난 자기 안의 독특한 심연을 창출하는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 “하나의 스타일을 갖는 것은 허구”라고 말한다. 매일 변화하는 자연 본연에 스스로를 던지며 작업하다 보면 그림이 자신이 되고, 자신이 그림이 되는 매일 다른 우일신(又日新)의 경험과 만나기 때문이다. 색은 욕망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 안에 검은 흰이라는 색의 제약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작가는 무력과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통제하면서 자유로워지는 ‘진정한 정신화’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레이에 가까운 블랙과 화이트의 규제는 깊이 있는 색의 층차(레이어)를 모두 끌어안은 색의 원형을 찾아가는 에너지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박기원, 제여란을 말하다
내가 생각하는 제여란은 자기 세계를 잘 구축해가는 작가이다. 최병소는 가장 얇은 그림을 그린다면, 제여란은 가장 두꺼운 그림을 그린다. 한 명은 동쪽으로 한 명을 서쪽로 갈만큼 서로 다른 길을 가지만, 어느 지점에선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 머릿속에 대략의 큰 이미지가 남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나와는 접근방식이 상당히 다르다. 다름에서 오는 매력 때문일까. 다른 길을 가서 더 재밌고 좋다.

최병소, 제여란을 말하다.
응축된 에너지와 몸으로 하는 작업이 특징이다. 대구 인당미술관 전시 때도 제일 먼저 갈 만큼 애정이 있다. 거칠고 과감한 시각이 대단하다. 정해진 길이 아닌 험한 길을 걷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해답은 없다. 잡히는 것은 없지만 그 안에서 보여지는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자신만의 태도가 확고하다는 것이다.


박기원 평론
개념을 공간화하는 행위, 힘을 빼면 힘이 생긴다.

다양한 재료로 구현해낸 작업들, 회화나 미술의 근원을 찾아가는 시각, 그린 옥색 계열로 그려내지만 본질적이면서도 원형적인 관점은 ‘검은 흰’에 대한 박기원만의 해석이다. 작가에게 행위란 그림이 붓글씨로 선을 연습하듯 수직 수평을 계속 반복하는 과정이다. 박기원은 급변하는 사회를 흡수한 스폰지처럼, 급진적인 현대사회의 아방가르드를 정해지지 않은 재료 속에서 행위 한다. 작가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시대정신의 흐느적거림(집단 무의식의 공간화)’을 캐치하는데 능통한 작가다. 느릿한 움직임, 차분한 손놀림,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똑바로 걷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면서도 발표된 작품들은 모두 계획된 코드를 갖고 있다. 아무것도 그려놓지 않은 일종의 모노크롬 페인팅들은 캔버스, 한지 등 다양한 바탕 위에 작가의 드로잉 행위들이 표출된 흔적이다. 작가의 느슨한 감성 작용 속에서 한계란 없다. 박기원은 사람들을 미궁(迷宮)에 빠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모호한 탁월함, 이율배반적인 언어가 주는 탐색의 즐거움은 우리의 삶을 낯선 웃음으로 희화시키는 ‘블랙 희극’과 같다.

작품들은 “다원화된 세상을 하나의 눈으로 만드는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준다. <올해의 작가전 2010>에서 거대한 공간을 <희미한>, <배경>, <에어 월>로 구성한 것에서도, 결과가 아닌 관람객과의 공적 상호작용을 통한 강조한 바 있다. 작품 사이를 매개한 과정지향성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토록 유도하는 작가의 질문하는 성향과도 연계돼 있다. 어둠은 ‘검은’과 동의어가 아니다. 어두운 지점들이 우리의 눈을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눈속임 마법을 부리는 것이다. 힘을 빼고 힘을 만드는 작가만의 기술은 어찌 보면 실재를 환영처럼 만드는 마법이며, 신기루를 작품처럼 해석케 하는 독특한 능력이다. 작가의 모호함은 관람자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오랜 기간 작가의 행보를 눈여겨보면 의도된 모호함에 깔린, 독특한 낯섦을 공감의 기호로 전환 시키는 탁월함을 느낄 수 있다. 작가에게 ‘검은 흰’은 자신이 행위 해 온 작품을 향한 태도이자, 대상을 고정하지 않은 자기 철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최병소, 박기원을 말하다.
참 좋아한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때부터 한결같은 진정성이 작품에 녹아든 게 보였다. 같이 고민하고 한 시대를 걷는다는 점에서 응원을 보낸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진정성 있는 박기원만의 작가적 태도와 자세를 깊이 이해할 것이다.

제여란, 박기원을 말하다.
박기원은 희미한 유머와 비인칭적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나아가 연극적 상황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탁월함을 가졌다. 그는 뒷주머니 속에 검고 흰 바둑돌을 넣고 만지작거리며(囊中之石) 걷는 느낌을 주는데, 남기면서도 메우고 걸으면서 발자국을 지우는 술래잡기 같은 행위를 보여준다. 설명불가한 복잡한 세상 속에서 섬세함과 체념을 동시에 드러내는 행위들,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를 최단거리로 주파하는 상황의 용도변경이 가능한 작가 같다. 박기원 작가가 자신만의 위상과 궤적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가 궁금하다.


서문 / 안현정 (Ahn Hyun Jung, 미술평론가/예술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