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SSOM

 

종이 위에 새겨진 무한의 생명, Blossom


김은주 작가는 흑연이 주는 노동집약적 작업을 통해 대상을 가로지른 생명의 순환과정을 그린다. 2001년 부산미술협회의 제1회 오늘의 작가상 청년작가상을 수상한 이래, 2016년 부산시립미술관(BMA) 신소장품 전시도록에 표지작가로 선정될 만큼 영향력 있는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특히, 드로잉이 미술사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자리매김하는 시점에서, 작가는 ‘긋는다’는 행위를 ‘완성된 작품’으로 옮겨내어 ‘추상과 구상’, ‘흑과 백’, ‘여백과 대상’의 허실상생을 넘나드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그림의 잔상은 먹의 번짐을 통한 수묵모노크롬의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본질로 들어가 보면 행위성에 집중된 과정 중심형 작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종이위에 담긴 허실상생(虛實相生)의 미학

인체에서 자연으로 확장된 무한의 생명력이 손의 노동으로 펼쳐진 김은주의 작품세계는 ‘그려보다-190920/211012 …’는 제목들이 보여주듯이, 그린다는 본질과 그려진 시간성에 초점을 둔 ‘현실집약적 행위성’을 담아낸다. 흑백의 모노크롬을 작업의 본질로 삼되, 빈공간과 채워진 공간 사이에 가능성의 영역을 남겨두어 ‘허실상생(虛實相生: 비우고 채움이 함께 어우러짐)’의 에너지(氣)를 통해 무한대로 확장하는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2016년 부산시립미술관 신소장품전시에 출품된 거대 작업은 5폭의 거대한 그림이 하나로 결합된 210×675cm의 ‘병풍구조’를 보여주는데, <가만히 꽃을 그려보다>의 명명된 이름처럼 작가는 거시구조 안에 미시적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다.

김은주의 작품은 멀리서 인지하면 발묵(沒骨法:외곽선을 그리지 않은 번짐)효과를 강조한 진한 먹의 운용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작품의 본질에 다가가 보면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낸 기본에 충실한 작업임을 알게 된다. 조감법(鳥瞰法; Bird's eye view)으로 그려진 산수화가 연상되는 ‘종이 선묘(線描)의 꽃송이 풍경’들은 어찌 보면 형상이나 의미를 넘어 선들이 중첩된 생명력의 무한한 에너지 자체를 표현하는 듯하다. 실제 작가는 대상을 강조하지 않은 채, ‘그려보다’는 이름을 툭하니 던져놓는데, 무심히 자리한 명명 안에서 자연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소요자적(逍遙自適)’하는 경지를 느낄 수 있다. 보는 이들 역시, 작품의 여백과 선을 오가면서 노닐다 보면 대상 사이에 흐르는 바람과 공기의 기운을 만날 수 있다. 멈춤과 움직임 사이의 행위성이 리드미컬한 모노크롬 안에서 꽃을 피우는 작품들은 크기와 상관없이 작품 안에 작가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다. 흑연의 무한한 확장성이 주는 무한의 상상력 속에서 우리는 삶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다양한 명상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