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ON JAE NA
권재나의 작품들은 회화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과거부터 이어져 온 작업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작가의 고민이 지속적으로 공간에 천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10년에서 2012년 무렵까지 이어진 팝업(pop-up) 형식의 작업들은 회화적 추상의 세계가 어떻게 현실로부터 돌출된 공간을 창조하거나 혹은 현실의 공간으로 침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들은 사실상 고정되어 있지만, 팝업 북이나 접이식 부채처럼 여러 면이 겹쳐지며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형식을 활용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작품이 점유하는 공간을 유동적인 것으로 상상하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이 형식은 각 면들이 경첩으로 연결되는 접점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며, 이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작품은 완전히 자유로운 추상적 공간을 표상하는 데에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 후에 이어진 장소 특정적 조각 작품들은 작품이 점유하는 공간 안에 추상의 세계를 창조하기보다는 전시장이라는 장소 자체를 변형시켜 관람객들의 새로운 지각적·신체적 경험을 유도하려는 노력이다. 2014년 벽 자체를 3차원의 구조물로 보고 조형적 변형을 가한 <Wall Building>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실험은, <Fold, Illuminated>(2019)에서는 벽에 붙어있는 평면을 구부리고, 띄우고, 세우거나, 바닥에 떨어뜨리고, 또 천장에 붙이는 형태로 실현된다.
<Wall Building>의 구조물이 자신이 속한 공간 전체에 대한 관람자의 지각 경험과 긴장 관계를 이루는 반면, <Fold, Illuminated>에서 관람객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 안으로 돌출되어 있는 구조물 하나하나와 좀 더 개별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 각각의 구조물에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고, 멀어지는 감상자는 피사체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활동에 좀 더 집중하게 되며, 물성을 가지는 미술 작품과 상호 작용할 때 일어나는 시각 경험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작품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상적 움직임에서 벗어난 지각 작용과 신체적 활동을 유도하고, 나와 몸,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환기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는,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 형태의 작품들에서 추상 회화의 시각적 효과와 결합을 이루게 된다. 겹쳐 그은 붓자국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종이를 잘라 접은 콜라주 같기도 한 이 작품들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 그 어딘가의 위치를 점한다. 작품은 좀 더 벽에 납작하게 붙어 평면에 가까워졌지만, 그 모양은 투명해져버린 사각 캔버스의 형태에서 벗어나 있으며, 옆면은 일반적인 캔버스가 갖는 엣지를 거부하고 서서히 벽면으로 둥글려져 작품의 물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동시에 접혀 있는 종이 콜라주 같은 모습은 그 면들 사이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움직임을 내포하여 고정된 물체의 특성에서 벗어나려 하며, 좀 더 떨어져 보았을 때는 마치 한 번에 그은 붓자국처럼 지각됨으로써 추상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를 떼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추상 회화에서 발견되는 붓자국들은 개별적으로 캔버스를 부여받음으로써 그 각각의 붓질 안에 내포된 형식적 고민과 아름다움이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는 또한 여러 안료들을 실험하는 과정을 통해 직접 만들어낸 색을 사용하는데, 이를 통해 각 붓질의 독자성이 한층 더 강조된다. 각각의 셰이프드 캔버스가 가지는 다양한 형태와 색은 작가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경험, 기억, 감정, 인상,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무의식이 긴 시간 동안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증류과정을 통해 추출되어 형식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붓자국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를 필두로 한 모더니즘 비평가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통해 신화화되었으나, 그 후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이 그 물성에 주목하며 그 신화 또한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붓자국 안에 담긴 형식적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이 불러내는 우리 내면의 감정들까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특히 권재나는 셰이프드 캔버스를 통해 역설적으로 붓자국의 물성을 그러한 미적 경험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로 활용한다. 관객들은 회화도 아니고 3차원의 조각도 아닌 중간적 위치를 점하는 이 응축된 요소들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고, 만나며, 이들과 체험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요소들이 살아 숨 쉬는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권재나는 긴 탐색의 과정을 거쳐 다시 회화 평면으로 돌아가, 이를 모든 현실적 제약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관계맺음의 공간으로 제시한다. 이 회화 평면에서 관객들은 셰이프드 캔버스의 형태로 맞닥뜨렸던 붓자국들이 유영하는 추상의 무대를 만나게 된다. 작품 속 공간은 보편적 세계에 대한 은유나 해석, 작가의 철학적 신념이 담긴 붓질, 또는 끊임없는 수행성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작가가 개별자로서 세계를 경험하며 응축한 미적 요소들로 구성된 사적 세계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고, 색의 폭발이 있고, 붓자국과 종이 콜라주처럼 보이는 면들이 뒤섞여 있고, 녹아드는 색채와 겹겹의 층들이 만들어내는 깊은 공간이 있다. 여기에 초대된 관객들은 작품이 만들어낸 무대로 진입하며 그 요소들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제각기 관계를 맺는다. 작가는 세계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내리고 붓자국을 그 행위로서 화면에 새기거나 압도적인 시각적 자극을 통해 관람객을 에워싸기 보다는, 붓자국이 마치 배우처럼 살아 움직이는 무대 안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과정을 통해 관람자 개개인과 접속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재나 회화의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그 안에 담긴 공간의 개방성이라 할 수 있다. 2020년 회화 작품을 VR이라는 매체로 구현하였던 것도 동시대적 시각 경험의 지평에서 공간이 체험되는 새로운 방식들에 대해 고민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 세계의 정수가 담긴 추상 회화의 화면이 아니라, 더욱 정제되고 심미적인 만남, 교감, 그리고 관계짓기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서 새로운 공간을 열어젖히는 회화는, 그러한 목표를 가진 형식주의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2020년, 권재나는 자신이 오랫동안 거주하던 뉴욕 플러싱 지역의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커미션을 받았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아시아계로 이루어진 플러싱 지역은 코로나19로 인해 촉발된 무차별적인 혐오와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얼어붙은 경제 활동으로 인해 지역 전체가 고통에 직면해 있었다. 권재나는 자신의 셰이프드 캔버스를 확대하여 이를 앞뒤로 붙인 형태의 작품 <Heart as One>을 제작했다. 붉은 붓자국, 혹은 콜라주가 하트의 모양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실용적 목적만을 가지고 건설된 빌딩과 구조물들로 형성된 도시 중심부에 개입함으로서, 목적지만 바라보고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그들이 자신을 둘러싼 공간, 그 외부의 세계를 바라보게 했으며, 잠시나마 그 공간이 제공하는 정신적, 심미적 고양에 함께 시간을 할애하게 만들었다.
근대의 고정된 주체가 오랜 시간 도전받으며 해체되기에 이른 지금, 예술을 통해 보편적 인간이 가지는 근원적인 감정을 탐구함으로서 나를 되돌아보는 것이 철지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정체성 정치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이는 인류 보편의 주체는 거부할지 몰라도 특정 정체성을 공유하는 주체들과 그 외부의 경계는 더욱 공고하게 설정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정체성 정치는 그 외부의 주체가 자신의 경계를 무너뜨려 다른 주체들을 받아들일 때만 유효하다. 목표 지향적 행위들로 가득 찬 삶에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특정 정체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인식하지만,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 보편이 공유하는 근원적 기쁨, 슬픔, 고통, 불안, 환희를 탐구하기를 멈추었다. 정신적 고양 앞에서 인간으로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에 솔직하게 직면하는 것, 그리고 타인, 나아가 모든 생명체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중요하다. 권재나의 회화는 이를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반복해서 실천하기 위한 무대를 준비해 놓고 있다.
접속의 장소로서의 회화 (독립큐레이터 이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