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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ve in gaze
앵커 1

정보영, 김지원 2인전
Wave in Gaze, 본질을 꿰뚫는 방법


어떤 상황, 어떤 대상에만 빠져들다 보면 진짜 보아야 할 것들을 놓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보는 눈’이다. 상황을 잔잔한 빛으로 녹여내는 정보영, 강렬한 본질을 꿰뚫는 김지원 이들 사이에는 ‘우리네 삶의 진짜 본질’들이 파장 아래의 심연처럼 감춰져 있다. 이 전시는 두 작가의 외연과 내연 사이를 오가며 ‘진짜 자아’를 찾아간다. ‘Wave in gaze’는 ‘시선을 흔들다’는 뜻으로, 심연을 응시(凝視/gaze)할 때 일어나는 파장,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처럼 나비의 날갯짓이 파생하는 인과(因果)의 메시지를 담는다. 김지원이 본질을 향한 강렬한 메시지를 시각화한다면, 정보영은 상황·맥락을 응시하는 차분한 본질을 보여준다. ‘꽉찬 욕망’과 ‘텅빈 욕망’은 비교·대조하는 가운데 서로 순환하며 상보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정보영의 작업은 캔버스를 순환하는 빛을 다룬다.”
빛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과 그림자를 동시에 인지하는 것이다. 빛이 결이 된 공간, 어두움과 밝음은 캔버스를 하나의 시간(현재성)으로 인식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 작가는 이를 포치(布置)하기 위해 리얼리티를 사진작업 속에서 선별하는데, 다시 회화로 변용된 감각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삶의 진실에 대한 다양한 층차의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비물질을 실재화시킨 가상 구현의 긴 역사를 ‘얕은 공간 안에 의도적으로 선보임’으로써 ‘환영의 속성’ 그 자체까지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재현(Re-Pesentation)을 현재성(Present)과 가상성(Re-Virtual)의 관계미학으로 연결한 작업들은 지우고 여는 붓질 속에서 캔버스의 앞뒤를 순환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라스메니나스)>(1599)처럼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시간여행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김지원의 작업은 다면(多面)의 상처를 꿰맨 치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오랜 기간 관찰과 탐험의 대상이던 맨드라미는 대상재현을 넘어 숨은 본질을 끌어내는 의인화된 매개체로 기능한다. 작가는 맨드라미·레몬과 같이 대상을 색으로 현혹시키는 강렬한 주제를 채집해 ‘자기 파격의 메시지’를 노래해 왔다. 맨드라미는 잡초와 같이 뿌리째 뽑히지만 이내 생명을 틔어내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다. 대담한 터치와 생략, 낭만적이면서도 표현적인 획의 운용은 관습적이기보다 규범을 깨는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고통 어린 현실을 낭만적으로 돌파하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건드리면 터질듯한 생동하는 작업들 속에는 무기력한 우리네 삶을 어루만지는 따스함에 내재 돼 있다. 작가는 사물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 속에서 회화의 본질을 향한 집요한 작가정신을 실험하는 것이다.

《Wave in gaze》는 두 작가가 오랜 시간 응시해온 풍경·공간·일상을 주제로 회화의 진정성과 작품의 아우라(Aura)에 주목한다. 여기서 응시의 개념은 사르트르와 라캉처럼 상보적이면서도 이율배반적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세미나1: 프로이트의 기술 에세이』(1953~1954)에서 응시에 대해 처음 거론했는데,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응시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Regard’의 영어번역을 ‘Look’이 아닌 ‘Gaze’로 설정했다. 사르트르(Look)에게 주체는 타자에게 발견·관찰되는 수동적 의미라면, 라캉(Gaze)에게 주체는 “자아와 타자를 포괄하는 응시 그 자체” 즉 전체를 아우르는 총체적 의미를 갖는다. 이 전시는 본질을 향해가는 두 작가 사이의 진지한 고민에 ‘보는 동시에 바라보는 라캉의 응시’를 대입한다. 심리적 욕망을 건드리는 이들의 작업은 ‘상처의 미학’이라 할 만큼 ‘화가의 자리(Zeitgeist, Identity and Position)’에 대해 다시 묻는 자기 분석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작지만 본질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진다. 강가에 돌을 던지면 물결파가 발생해 에너지가 이동하지만 물의 질량은 유지되는 것과 같다. ‘지금-여기’의 작품들은 ‘파장의 변증법(Dialectic of Waves=동적/정적 관조의 합)’을 통해 삶의 상처를 드러내지만, 다시 세상을 읽는 기회의 창(窓)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안현정(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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