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靑)의 언어
김춘수, 장승택, 신수혁, 김이수
2024. 5.23(목) - 6.29(토)
청(靑)의 언어, 깊고 오묘한 깨달음
아트프로젝트 씨오(대표 임은혜)는 만춘(晩春)의 한가운데에서 한국 추상회화의 입지를 다지고 있는 작가 김춘수, 장승택, 신수혁, 김이수가 참여하는 ‘청(靑)의 언어’를 개최한다. 단색조의 깊이를 ‘청_BLUE’이라는 공통언어로 치환한 이번 전시는 동시대 추상미감 속에서 ‘청(靑)_빛’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다. 국어사전에서 ‘청색(Blue, 靑色)’은 “맑은 가을 하늘과 같이 밝고 선명한 푸른색”이라고 표기한다. 풀잎의 초록색 기운과 닮았으나 안에 깊은 자색(自色)을 머금고 있어, 특정한 색을 의미하기보다는 추상적인 스펙트럼을 가진 ‘확장의 에너지’를 내포한다. 동양에서 청색은 회회청(回回靑)이라는 코발트 성분의 안료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백자에 이 안료로 그린 그림을 청화라고 하였으며 청화가 그려진 자기를 청화백자(淸畵白瓷)라고 하였다. 15세기 경에 이 안료는 페르시아에서 중국을 경유하여 수입되었기 때문에 금값과 같이 매우 비싸게 거래되어 '하늘빛-바다빛을 머금은' 귀하디 귀한 색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에서 청색은 동식물과 광물에 포함돼 있었음에도 가장 뒤늦게 생산되고 사용된 색이다. 12세기 중세 신학은 "빛은 표현할 수 없는 시계(視界; 시각체계)"로서 그 자체로 신의 현현(顯現; 명백하게 나타남)으로 인식되었다. 그 안에서 청색은 신성한 천상의 빛이자, 모든 창조물을 비추는 빛으로 등장했고 금색과 유사어로 통하게 되었다. 중세 생드니(Saint-Denis)의 수도원장 쉬제(Suger)는 교회를 천국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 '교회의 빛을 정화하는 스테인드 글라스'에 '생드니의 청색'을 도입해 '파랑=천상의 색'으로 기능하게 하였다. 이후 청색은 왕의 권위-성모마리아의 순결-부유한 계급의 여유 등을 상징하는 귀한 색으로 자리매김 한다. 이렇듯 청색조는 동서양 모두에서 감성적 순수를 나타내는 개념 언어이자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영적인 색'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청색미감의 깊이를 추구해온 4인 작가의 깊이 있는 작품세계가 우리 시대를 어떤 방식으로 반추하는지를 살펴보는 자리다.
특유의 청색조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해 온 김춘수(Kim Tschoon Su, 1957~) 작가는 동양의 정신성을 바탕으로 반복과 행위성에 집중하여 궁극적인 실체와 진실에 다가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푸른 캔버스에 담긴 모노톤의 청색만으로도 ‘동시대의 서사(흐느낌과 어우러짐)’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회화의 진실을 통하여 자신을 찾는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작가의 <울트라-마린>은 푸르디 푸른 깊이를 통해 회화의 본질을 찾아간다. 푸른 공명(共鳴/公明; 귀와 눈의 밝은 울림)과 기세(氣勢)가 느껴지는 그림들은 붓이 아닌 ‘몸의 필세(筆勢; 몸놀림의 기세)’를 통해 푸른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수상한 청의 언어 너머’에는 존재를 명징하게 의미 짓는 푸름의 가치가 자리하는 것이다.
장승택(Seung Taik Jang, 1959~) 작가의 ‘겹 회화’는 푸른 빛의 레이어를 응축해 자연의 언어를 화면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번 전시 출품작들은 작가가 고안한 1미터가량의 평판 붓으로 푸르디 푸른 자연의 겹을 담았다. 색과 색이 겹쳐 올려진 세계,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실험한 반투명성의 색들은 자연의 여러 시간을 머금은 듯 ‘삶의 스펙트럼’이 되어 우리 앞에 자리한다. 빛과 색이 물질을 통하여 드러내는 보편적 세계관들은 재료실험을 끊임없이 이어온 자기혁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작가만의 정교한 제작과정 속에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물성의 장악은 투명한 색채와 빛의 순환을 ‘작가의 신체화’를 통해 중화시켜낸 작가정신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수혁(Shin Soohyeok, 1967~) 작가는 시공간의 기억과 경험을 ‘멜티드 블루(Melted Blue)’로 치환한 세필(細筆)의 스토로크로 그리드 구조를 만든다. 선을 켜켜이 쌓고 지우고 그리고 또 다시 채우고를 반복하여 완성된다. 작품은 시공간의 흐름을 연결한 ‘다층(多層) 회화’임에도, 무게를 덜어낸 물의 언어를 연상시킨다. 맑고 시원한 화면들은 가로 세로로 쌓아 올린 얇은 층을 통해 ‘고된 노동(혹은 우리의 삶)’마저 ‘균형’으로 연결한다. 작가는 말라버린 과거와 진행되는 현재를 더한,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을 통해 회화의 임계점(Threshold; 물리적 현상이 다르게 규정짓는 경계값)을 실험한다. 평면에 저장된 시공간의 합은 미지의 세계를 창출하며, 블랙홀 같은 가능성의 에너지와 마주하게 만든다. 오묘한 청빛과 시공간의 해체를 통해 창출된 ‘청의 그리드’는 우리 삶을 희망 가득한 미래로 안내한다.
김이수(Kim Yisu, 1974~) 작가는 미세한 색띠의 중첩을 무수하게 연결해 지평선이나 하늘을 연상시키는 청색 추상을 선보인다. 작품 속에 흐르는 비례미감은 시간과 기억의 지각을 가로지르는 ‘균형잡힌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앵프라맹스 풍경 (Inframince-Landscape)’이라고 명명한 작품들에서 감각적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뉘앙스(미세한 차이)’를 작품 표현의 기본 수단으로 삼는다. 여기서 앵프라맹스란 감성을 따라 흐르는 ‘얇디 얇은 결의 풍경'으로, 삶의 여러 순간들을 아름답게 결합하는 '원형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신기루와 같은 모노톤의 화면은 수많은 띠의 겹침 속에서 미세한 레이어의 그라데이션으로 완성된다. 자연을 따라 흐르는 빛과 공기 등의 비물질적 요소들이 ‘아름답게 물질화’됨으로써 아픈 기억까지도 끌어안는 ‘치유의 풍경’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