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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 SANG CHUL

(b.1946~)

비워내기, 또는 자신으로서 존재하기로서의 회화


최상철의 회화세계는 붓이나 팔레트, 이젤 같은 전통적인 작업 도구를 멀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관념이 도구를 만들지만, 도구가 관념을 지배하기도 하기에, 도구를 바꾸지 않는 한 관념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젤 페인팅을 위해 고안된 계몽적 도구는 최상철이 생각하는 탈계몽의 기획을 실현하기에는 부적절할 뿐이다. 그의 도구들은 그의 작업에 특화된 것들로, 우연히 획득된 것이거나 손수 깎고 다듬어 만든, 도구라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한 것들이다.
‘그리기’라는 의지적 수행과 절연하는 것이 다음으로 중요하다. 이 세계는 의지적 수행으로서, 학습된 그리기의 산물이 아니어야만 한다. 그리기에 수반되는 이미 규범들, 안료의 배합과 채색의 조절, 원근법 같은 구성이나 구도와 관련된 규범, 인물이나 정물의 표현을 위한 방법들 같은 계몽주의적인 것들은 실제로 이 세계와 거의 무관하다. 최상철의 <무물.無物> 연작은 캔버스를 여전히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선, 원시 수렵시대에나 유용할 듯한 단순한 도구와 중력을 활용하는 약간의 기술만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회화적 과정은 검정 안료 통과 그것에 담궜던 적절하게 덜 둥근 돌, 그리고 그 돌이 캔버스의 곳곳에 구르기의 궤적을 남기도록 캔버스의 기울기를 이리저리 조절하는 수고로 구성된다. 안료를 잔뜩 묻힌 돌은 순백의 화폭 위의 임의의 한 점에서 첫 번째 구르기를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작업 전체에서 중심이 되는 돌을 굴리는 힘의 출처가 중력이라는 사실이다. 최상철은 그 힘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 검은 색 안료와 안료 통, 적절하게 덜 둥근 돌, 기울기 조절에 용이하도록 배치된 캔버스를 마련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겸허하게 축소시킨다.
잊지 않아야 할 또 한 가지는 이 작업이 시작되는 첫 순간부터 작가의 의지가 배제된다는 점이다. 출발점은 작가가 공중에 던진 안료가 묻은 작고 동그란 고무패킹이 중력에 의해 자유낙하한 지점이다. 첫 번째 구르기의 시점이 이렇게 설정된다. 돌은 안료를 머금은 채 기울어진 캔버스의 아래쪽으로, 구불구불한 궤적을 남기며 천천히 굴러간다. 돌이 캔버스의 각 변의 끝에 다다를 즈음, 작가는 캔버스의 기울기를 달리해 다른 쪽으로 구르도록 만든다. 돌에 묻은 안료가 소진되어 구르는 돌의 궤적이 희미해기 시작하면, 다시 돌을 안료 통에 넣었다 빼서 이제까지의 과정을 되풀이한다.
시점이 주체적 의지의 밖에서 설정되는 것처럼, 종점 또한 그러하다. 돌은 어느 시점에서 구르기를 멈추는가? 이 행위의 반복은 어떤 계기로 인해 중단될 것인가? 시각 효과가 극대화되는 지점에서? 처음 의도했거나 발상했던 것이 성취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하지만, 신출한 발상이나 아이디어, 관념은 이미 추방되었고, 따라서 ‘완성’이라는 계몽주의적 개념에 부합하는 기준 또한 부재하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그것의 완성을 가름할 수 있는가? 이것이 최상철의 회화 단계에서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문제다. 완성이 세계를 대상화하고, 주체적 의지에 최종적으로 굴복시키는 단계라는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최 상철의 회화에서 완성이 왜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작, 과정, 완성의 구분개념 자체가 행위주체를 중심으로 성립된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최상철 스스로가 시작하고, 구성하고, 완성하는 주권을 스스로 반납했기에 그런 구분은 여기서 하등 덧없는 것들일 뿐이다.
최상철은 최대한 무상(無想)으로 정진하고자 하는 행위를 어느 시점에 그저 중단한다. 조형적, 담론적 성취나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 같은 통상적인 완성의 준거에 견주자면, 말 그대로 임의의 시점에서 종료된다. 임의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그만할 때가 되었으니 그저 그만두는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임의적인 것은 아니다. 1천 번의 반복이 행위를 중단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에는 일천 배의 치성이라는 불교적 정서가 배어 있지만, 최상철은 ’집중과 수고의 시간‘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진 말아줄 것을 당부한다. 1 천의 숫자에 지나치게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실제로 그다지 의미있는 접근은 아니다. 그는 종종 21656개의 구멍을 뜷거나 22112번의 칼질로 나무를 깎기도 하는데, 모두 그가 살아온 날 수이다. 예컨대 그는 그가 태어난 지 21916번째 날에 21916개의 점을 찍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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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으로 둥굴지 않은 돌이 뒤뚱뒤뚱 구르며 남긴 궤적과 그 1 천 번의 축적이 남긴 흔적은 실로 경이롭다. 주체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의지적 수행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이 회화는 종종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이나 사이 톰블리(Cy Tombly)의 것과 비교된다. 발상이나 구성 단계에서 유사성이 없지는 않더라도, 그것들 사이에는 근원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최상철의 회화는 폴락의 회화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초월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차원의 추구와 전적으로 무관하다. 최상철의 회화는 ‘그가 가장 그 자신이 되는’, 마치 나무가 자연스럽게 나무 로서 존재하는 것 같은 존재의 상태에 관한 일종의 기록과도 같은 것이다. 왜 1천 번인가를 묻는 질문에 최상철은 답한다. "같은 행위를 1000번쯤 반복하면, 내 생각이 먼지처럼 조금씩 조금씩 화면에 쌓인다."
이렇듯, 최상철에게 회화는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곧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 자체이기도 한 자신으로 살고 행위하기로서의 회화인 것이다. 튀빙겐 대학의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교수의 말처럼, 인간은 그 안에 인격을 지닌 자연이다. 존재를 감각한다는 것과 자연을 느낀다는 것은 것과 서로 분열된 두 체계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사는 것과 자연을 닮아가는 것, 인격의 심화와 자연으로서의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내면세계를 휘감는 사이 톰블리의 격앙된 감정의 분출로서의 드로잉을 이 세계의 참조로서 불러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최상철의 세계에서 톰블리의 드로잉을 뜨겁게 했던 순간적으로 치솟는 열기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존 케이지(John Cage)와는 어떨까? 주체의 배제와 우연성의 진전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최상철의 회화는 반미학이나 반예술과는 애초부터 무관하다. 반미학이니 반예술이니 하는 것들 자체가 매우 주체적인 수행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비판하고, 도전하고, 전복시키고자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최상철이 매순간 내려놓는 충천한 의지로부터 힘을 제공받아야만 한다. 최상철의 회화는 오히려 그 전위적인 것들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이 회화는 도전이 아니라 수용의 산물이고, 저항이 아니라 순응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중력에 순응한다. 던져진 것은 떨어지고, 돌은 기울어진 곳으로 구른다. 자연이 그런 것처럼. 숲이나 나무가 그런 것처럼. 나무는 더 많은 나무들에게 존경받는 나무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나 자신이 그 같은 요구에 부합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의해 더 좋은 나무가 되거나 숲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는 그저 나무임으로써 그것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낸다.
최상철의 회화는 시작의 부재로 시작하고, 완성의 부정으로 완성된다. 도구는 원시적이고, 조형은 중력적 구르기로 대체된다. 표현의 욕망은 확증되는 대신 비워진다. 최상철에겐 이것, 곧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 회화다. 하지만 이 진술은 비워내기의 의미가 제대로 제시되기 전에는 결코 온전한 것일 수 없다. 여기서 비워냄은 잘못 채워진 것들의 비워냄이자, 그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신으로서 사유하고 느끼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으로서의 비워냄이다. 그 비워내기를 통해서만 학습을 맹신하고, 덧없는 장식성에 매진하며 더 나아가 당대의 주류 경향과 취향에 편승하고자 하는 욕망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가능한 그런 비워냄인 것이다. 최상철의 회화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회화하기에 대한, 욕망에 의해 덜 오염된 질문을 던질 용기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상용(미술사학 박사/서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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