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 SEUNGTAIK
(b.1959~)
“빛과 색채는 회화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지만, 나의 작업에 있어서 그것들은 반투명한 매체와 함께 절대적 요소가 된다. 증식된 투명한 색채와 빛의 순환에 의한 물성의 구체화를 통한 정신의 드러냄이 내 작업의 진정한 의미이다.”
장승택, <작업 노트> 중에서
회화란 무엇인가? 장승택의 작업은 이처럼 소박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회화적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림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사물(objet)’에 가깝다. 붓질을 하지 않은 ‘사물로서의 회화’가 장승택이 원하는 현대미술 문맥에서의 지평인 것이다.
장승택의 작업은 한국 단색화(Dansaekhwa) 작가들 중에서 행위의 반복을 통해 고유의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한 박서보, 이동엽, 정상화, 최병소의 작업 태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이 앞에서 열거한 사람들은 육체적 고행을 통해 정신을 물질 속에 녹여내고자 한 작가들이다. 적어도 ‘정신’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앞서 예로든 1세대 단색화 작가들과 장승택의 작업태도는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그러나 박서보, 정상화, 최병소의 작업이 반복적 행위를 통해 형성된 물질감이 강조되는 반면, 장승택의 그것은 매끄러운 표면을 요체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질감 자체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그러한가?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재료적 측면이다. 최근 몇 년 간에 걸쳐 장승택이 사용하는 재료는 플랙시글라스이다. 합성수지의 일종인 이 재료는 작가의 요구에 의해 특별히 제작된, 두꺼운 사각 캔버스의 대용으로 사용된 것이다. 두께가 5센티에 이르는 투명한 이 ‘사물(objet)’은 딱딱하게 각이 진 기존의 캔버스와는 달리 모서리 부분이 둥글게 마감된다. 그것은 캔버스라기보다는 오히려 넓고 큰 박스를 연상시킨다.
장승택은 이 넓적한 박스 형태의 사물을 작업대 위에 눕혀놓고 스프레이 건을 사용, 특수 미디엄과 섞여 묽게 희석된 아크릴 물감을 반복적으로 도포(塗布)한다. 이 때 묽은 물감 용액이 평평한 오브제의 옆으로 흘러내려 일련의 자국을 형성하게 되는데, 20여 차례의 반복과정을 거쳐 형성된, 색깔이 서로 다른 물감 용액의 자국은 미묘한 색의 차이를 가져오면서 적층(積層) 효과를 낳게 된다. 장승택은 이 모서리 부분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자기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
묽게 갠 물감의 용액이 스프레이 건에 의해 평평한 물체(objet)의 표면에 뿌려질 때, 미세한 물감의 입자들이 사뿐히(그러나 실제로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아주 천천히, 때로는 춤을 추듯이) 내려앉아 표면에 정착하는 과정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하나의 색깔이 물체의 표면에 뿌려지고 그것이 건조되는 동안 기다려야 하며, 그렇게 20여 차례에 걸쳐 물감의 도포(塗布)가 반복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물감의 적층(積層)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전개되는 언어의 측면에 비유하자면 이 모서리 부분의 표정은 다변(多辯)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완성된 작품의 표면이 가져다주는 침묵의 깊이에 비쳐볼 때 다소 수다스럽다. 일견 모서리 부분의 이 다채로운 시각적 효과는 물체의 정면에서 보이는 단일한 색채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모서리가 둥글게 마감 처리된 두꺼운 이 물체 위에 입혀진 물감의 층이 수십 차례의 반복적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증표들이다.
윤진섭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