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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YEO RAN

(b.1960~)

제여란, 그리기에 관하여

제여란은 30여 년간 붓이 아닌 스퀴지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그리기를 완성해 왔다. 스퀴지는 이미지를 종이에 인쇄하기 위해 물감을 밀어내는 도구다. 수직과 수평으로 내리긋기에 편리한 이 도구를 사용하여, 작가는 기세 넘치는 곡선들로 가득찬 화면을 구축한다. 화면은 주제와 배경으로 구분되지 않으며 세부 구획들로 나뉘지도 않는다. 작가는 과감하게 캔버스 전체를 유화 물감이 묻은 스퀴지로 돌리고 멈추기를 반복한다.

1947년 잭슨 폴록의 네 번째 개인전을 본 후, 그린버그는 <이제 이젤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자신만의 완전한 세계를 거대한 캔버스에 창조하고자 했다. 그들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한국 여성화가인 제여란은 완전한 형태의 세계가 아닌, 생명이 태어나고 변화하는 '기우뚱'한 자연들에 관심을 갖는다. 작가는 흙, 바람, 벌레, 나무와 같이 움직이고 사라지는 모든 삶에 깃든 혼돈과 떨림을 캔버스에 담는다.

지난 10년간 제여란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블랙 회화에서 벗어나, 화려한 색상들이 극적 대비를 이루는 회화들을 완성시켰다. 작가의 몸은 캔버스의 팽팽한 사각형 안을 즉흥적으로 움직여 강렬한 색들을 뒤엉키게 한다. 화면의 모든 구석들은 살아 숨쉬고 긴장감은 고조되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작가의 몸이 역동적으로 지나간 흔적들이 제여란의 그림이 된다. 회화에서 즉물적 형상은 해체되고, 새로운 비사물화의 그림이 탄생한다.

"추상회화와 구상회화의 구분은 그 의미를 잃었고, 완전한 추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여란은 말한다. 화가의 머리 속 이미지를 개념화하여 캔버스에 담는 행위 자체가 추상의 영역에 있다는 생각이다. 제여란의 그림은 스퀴지의 움직임이 멈출 때 끝나지 않는다. 그의 그림 앞에서 관객은 자신의 심상 안에 있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한여름 베어 물었던 차가운 자두 같기도 하고, 늦가을 로테르담 해변에 서서 바라보던 거친 모래 같기도 하다. 그림의 완성은 형상을 기술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앞에서 관객들이 떠올리는 각기 다른 이미지에 있다. 모종의 형상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제여란의 그림은 존재한다.


양지윤 (미메시스아트뮤지엄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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