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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YEORAN

(b.1960~)

제여란의 회화세계,
치열한 몸의 추상


제여란은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작가로 등단한 이후 94년 서울의 인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그 12년 후인 2006년 토탈미술관에서 그 사이 쌓은 역량을 보였다. 그리고 4년 후인 올 해 가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펼쳐보였다. 작업의 시간과 양에 비해 전시가 너무 잦은 요즈음, 제여란은 드물게 보는 작가이다. 그런데 그렇듯 쉽지 않은 그의 작업을 이번에 대구 누오보갤러리에서 제대로 볼 기회가 마련되었다. 1, 2부에 걸쳐 회화와 드로잉을 접하게 되었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술작품을 와인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포도 종자라도 일정한 시간과 척박한 풍수(terroir)가 아니면 좋은 와인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법이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제작된 작품은 가벼움을 벗어나기 힘들다. 아무리 좋아도 보졸레 누보의 상큼함이 그저 최선일 뿐.
미술이 ‘취향’인 것도 와인과 유사한 특징이라 여긴다. 프랑스로 치면 보르도 지역과 브르고뉴, 또 남불에서 나오는 와인이 확연히 다르고 또 이를 좋아하는 감식가들도 다르듯, 미술작품에 대한 취향도 각양각색이고 또 의당 그래야 할 것이다. 제여란의 작품은 아무래도 보르도 와인 쪽이다. 땅 냄새가 물씬 풍기고 오래도록 숙성되어 묵직하다. 완숙한 와인이 ‘둥근’ 맛을 그리며 입속에 은근한 여운을 오래 남기듯, 그의 그림은 ‘둘러댄다’. 작가가 자신의 제작과정을 설명할 때, “화면이 돈다” 혹은 “잘 돌아야” 그림이 제대로 된다고 묘사했는데 신기하게 맞아떨어진다. 작가의 몸으로 화면을 휘돌고, 관객은 그 둥근 동세에 눈을 싣는다.
와인이 제 향기와 맛을 발휘하려면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올라오는 절실하고 강인한 생명력이 요구된다. 물론 여기에 농부의 피땀어린 노동과 절대적 시간이 겸비되어야 한다. 제여란의 작업은 와인 포도밭의 농부같이 온 몸으로 치댄 느낌이다. 그는 그림을 붓으로 그린 게 아니라, 몸으로 비비고, 뭉게고, 감싸안은 것이라 말해야 맞을 듯하다. 그의 회화는 치열한 몸의 추상이다.


I.
자연의 색과 질감 그리고 힘

제여란의 회화는 강렬한 색채, 격렬한 붓질로 인해 역동감이 넘친다. 기.운.생.동. 색채는 몇 가지로 추릴 수 없이 무척 다양하나 공통의 특색이 있다. 그건 자연에서 비롯되는 색이란 점이다. 그의 작업에서는 자연의 색이 아닌 것이 없다. 그림의 표면을 따라가다 보면, 물감이 흙이고, 붓질이 바람이고, 작가의 몸이 동력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캔버스의 표면에 나뭇잎을 짓이겨 묻히고, 흙을 발라 섞은 것 같다. 아니, 그냥 자연스레 각양각색의 낙엽이 땅에 떨어져 섞여 들어가듯, 그렇게 나뭇잎이 대지에 묻힌다. 묻힌 다양한 색들이 함께 썪는다. 나뭇잎이 썩어가는 과정을 화면으로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제여란에게 통찰력은 자연에게서 부여받은 능력으로 인식된다. 그림 하나가 바람부는 숲 속이고, 또 다른 그림은 어둠이 깃드는 밤의 오솔길이다. 이 작가의 작업을 오래 보고 있으면, ‘숲 속에 서있는 단독자’가 느껴진다. 절실하고, 고독하며 그래서 격렬하다. 회화면에 붓질이 안무하듯 자유롭게 요동치는데 그 움직임에 환희와 절망, 그리고 생에 대한 갈망이 있다. 짓이긴 색채들이 융합되고 용트림한다. 다양한 색채가 놀랍도록 잘 어우러진다. 자연이 본래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화는 이를 따르는 듯하다. 표면의 질감 또한 멋대로이다. 규율을 떨치고 제약을 물리치려 한다. 나이브하고 거침이 없다. 말하자면, 의식을 벗어버리려는, 자기를 부인하는 격렬한 몸부림이라 해야 할까.
작업에 빠져 몰아(沒我)의 경지를 추구한다는 것. 그것이 이 작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의미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자아를 놓아버릴 때, 즉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에 임할 때가 가장 좋은 때라 한다. 작은 체구에 특유의 편안한 표정을 지닌 그이지만, 제여란은 몸을 도사리지 않는다. 그는 작업에 집중하는 순간을 “그림이 나를 뚫을 때, 작업이 통로를 열어줄 때”라고 표현한다. 완전히 소진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작가이다. 상투성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정신적 변비”에 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고 한다. “작업이 열병같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이다.
이제 중견 세대에 속하는 그는 여전히 젊은 패기에 넘치는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80년대 말의 젊은 제여란은 더 말해 무엇하랴. 88년 첫 개인전에서 그의 유화작업을 보고 이 일은 “대담한 조형적 해체와 행위의 궤적에 의한 생성적 공간의 창출”을 화두로 꼽았다. 20대 말 젊은 여류에게 그가 우려했던 “과잉"은 이제 50대 중견에 갓 들어선 작가에게 중후함으로 묵혀져 있는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이 작가에게는 열정과, 패기, 그리고 격렬함이 빠질 수 없다. 작은 몸에서 표출되는 큰 힘은 제여란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다.
제여란 작업의 열정은 분명 작가의 삶과 직결되어 보인다. 그리고 '나이브'하다고 할 만큼 직접적인 자기 표출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닌 점은 확실하다. 스스로 드러나는 “원초적 혼돈(混沌)”이라고 이 일이 표현했지만, 작위적인 행위를 피하려는 의식이 중요하다. ‘의식적 무작위’라고 말할 수 있고, 자연처럼 되려는 의도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제여란 회화가 혼돈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자연의 속성을 이원론적 구조로 이해하는 이 작가의 회화에는 나름 구조가 있다. 예컨대, 양 극단 사이의 동요가 보인다. 부재와 현전, 해체와 생성이 사이를 오가야 한다. 그래서 힘이 많이 드는 게다. 극단을 오가며 둘 다 걸치려면 에너지가 많이 요구되지 않겠는가. 물감을 붓고 밀어대고 긁어대는 행위로 양 쪽을 다 잡아야 하니 궤적이 클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의 작업을 부재나 공허로 치우쳐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기에는 그림이 너무 치열하다.
II.
밤의 색채 ․ 심연의 공간

단순한 검정이 아니라, 깊은 공간이 깃든 흑색을 상상해 보라. 이것을 우리는 밤의 색깔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제여란의 회화에서 보는 검정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밤의 색채를 낸다는 것 -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여란의 작업에서 최근 몇 년간 색채가 무척 밝아지고 더욱 다양해졌지만, 그 바탕에는 여전히 검정의 토대가 있다. 초기인 80년대 후반의 작업들은 흑색이 주조를 이뤘고, 90년대로의 들어서면서 흑색화면의 내부에서 어렴풋이 빛의 암시가 어려있는 작업을 보였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색이라든가, 심연의 모색이라는 추상적 말이 떠오르지만, 여하튼 이 시기 제여란은 빛의 아련한 흔적을 머금은 깊은 흑색에 몰두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작업은 대체로 작품의 크기 뿐 아니라 그 표현의 스케일이 대범하다. 1987-88년의 초창기 작업들부터 캔버스 또는 무명에 제작한 유채 대작들이다. 대담한 필치가 화면을 전체적으로 채우고 있는데, 붓의 격렬한 제스추어와 마띠에르의 두터운 질감이 표현주의적이다.
제여란의 흑색 회화는 깊이를 안은 짙은 검정이 거친 질감으로 화면에 포진해 있는데, 밤이 깃든 깊은 산속을 보는 느낌이다. 깊숙한 산속의 밤 풍경은 신비스럽게 무섭다. 검정은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강한 흡입력으로 나무며 바위를 잠식해 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 은근히 명멸하는 달빛이 있다. 엄습하는 절대적 고독감. 그런데 그 느낌은 절박하고 열정적이다. 짙은 검정 속에는 고독한 만큼의, 절망적인 만큼의 생에 대한 열망이 꿈틀거린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표현하고픈 심층의 흑색은 암울한 죽음이 아닌, 생의 약동을 머금은 색이란 점이다. 그 “내향적 공간”에서 고통을 감내하여 “고양되는” 색이다. 작가는 말한다.

흑색은 내게 위대한 신처럼 숭고하다. 그리고 흑색은 내게 집요한 성실함을 가르친다...흑색은 내향적 공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색이다. 물론 흑색의 이런 차원에서 반드시 심층적 시화된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면 암울하기만 하기 일쑤이다. 고양되는 경향성을 갖기 위해선 견디어 냄이 필요하다. (1990.8 작가노트)

그런데, 가장 깊은 밤의 색은 푸른색이 맴도는 검정이다. 옛부터 화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색이 푸른색인 것은 그것이 가장 깊은 색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을 푸른색으로 표현해 온 것은 하늘이 거리로만 이뤄진 공간인 것이다. 제여란의 작품 중, 예컨대 <되-ㅁ>(2006)과 같이 푸름을 머금은 흑색 그림은 그가 그렇게 그리고 싶어했던 “마술적인 밤 풍경” 그대로이다.
따라서 이 작가의 작업에 기조가 되는 흑색은 암시적 푸른색과 더불어 그 깊숙한 공간감을 확보한다. 이 때 검푸른색은 내향적이고, 무한할 정도의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숲속의 밤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듯이, 검푸른 그의 회화는 단일한 색조로 고정되지 않고 스러지는 빛의 반사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깊은 밤을 나타내는 제여란의 흑색을 보면 그 내성적 공간 안에 생성과 약동의 뉘앙스가 은밀하게 숨겨있는 듯하다. 그래서 작가가 이렇게 말했나 보다.

지금 내가 구하고자하는 것은 비형식의 공허함에 새로운 생명으로 채우려는 시도이다.


III.
과정중의 유기적 회화

제여란은 1992년부터 붓을 탈피해서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는데 실크스크린용 스퀴즈로 다량의 물감덩어리를 펴바르는 작업이었다. 스퀴즈는 그가 붓을 쓰며 그 동작에서 느꼈던 상투성을 거부하고자 활용했다. 이 도구는 그에게 자신의 제스추어를 제한하며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는 매체였다. 평소 도구의 예기치 못한 표현을 반겼기에 새로운 실험은 그에게 활력을 준 셈이다. 작가는 의식적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화면이 저절로 잘 돌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스퀴즈, 붓, 그리고 몸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업을 하는데, 전체적으로 전보다 편안하게 풀어진 느낌, 그리고 더 격렬한 감성의 작업들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유로와진다는 것을 그의 회화에서 실감하는 듯하다. 억제할 것 없이, 눈치보거나 머뭇거릴 이유 없이 직설적으로 발산하는 작업이다. 나이가 잘 들어 자유로운 사람을 보는 것 같다. 거침없이 말하고 힘이 넘쳐도 견뎌온 세월과 역경이 있어 자신감 있게 올라오는 자유. 제여란 회화에서 느끼고 또한 바라는 게 그런 것이 아닐까.
작가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재료 연구에만 2년여를 몰두했다고 하는데, 2000년에서 2006년 사이 발표된 작품들을 보면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수성안료에 접착제를 합하여 표현성을 증가시켰고, 아크릴을 활용하여 거대한 형상을 만들고 해체했는데, 특히 안료의 가벼움을 극복, 깊이감을 주고자 고민하였다.
이 시기(2000년에서 2006년까지) 작업한 작업의 제목은 ‘되-ㅁ (becoming & becoming)’이 대부분이다. 물성은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림자같이 모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존재감으로 드러난다. 잿빛 여명의 아련함이 나타나기도 하고, 한숨어린 흔들림이 순간의 아쉬움을 담기도 한다. 섬세한 질감이 보이는데, 캔버스에 고르게 뿌려진 모레가루의 알갱이가 빛을 반영하면서 텍스추어를 강조한다. 어렴풋이나마 존재의 부상을 목격한다. 밤의 출현, 달빛의 반영, 혹은 여명의 반사라고 묘사할 만한 암시적인 빛의 표현이다. 그림자와 실물의 숨바꼭질과 같이, 존재는 부재와 잊닿아 있으면서도 맞물리지 않고 빗겨 나간다.
제여란의 작업에서는 유동성과 움직임이 중요하다. 형성의 과정, 그래서 제목이 ‘되-ㅁ(becoming & becoming)’ 이다. 순간의 일별을 통해 이 고통스런 회화는 잡으려 갈망하는 존재의 호흡에 맞춰 들어간다. 작품은 생성의 시점에 얹혀있는데, 작가는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고 어느 때도 아닌 그런 시‧공간을 상정하는 듯하다. 그의 회화에서 안료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물감은 재현을, 삶의 구체적 형상을 덮는다. 순간의 정지가 일어나지만, 그건 실제와 환각의 경계에 걸려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양쪽을 동요한다.
그 과정의 흐름을 기(氣)의 유동성이라 할 수 있을까. 작가의 몸을 매개로 붓질이 맺히는 순간, 물감은 빠르고 느린 움직임의 자취를 사진처럼 기록한다. 작가의 몸은 없지만, 그 무게와 속도가 꿈틀대는 물감으로 고스란히 남아 현존의 흔적을 담보한다. 검정, 자주, 카키, 잿빛 색들이 물성으로 표면에 격렬하게 관계한다. 살며시 스며들고, 치열하게 공격하며, 흩뿌리고 충돌하며 용트림한다. 존재의 얼룩으로, 신체의 자취로 그 물감이 내보이는 표면적 밀착감이 놀랍다. 피부같이, 혹은 그림자같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결과적으로 우리는 표면과 색채의 유기적 관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붓과 몸을 본다. 이미 완성된 하나의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과정 중인 색채의 난무를 보는 것이다. 물성의 흔적들로 인해 이미 사라져 간 부재의 자취가 남는다. 이것이 관념인가? 육체인가?. 동일한 의미로, 시간인가? 공간인가?. 구조에서 벗어나는 체험. 제여란은 언어가 규정하지 못하는 낯선 세계를 추구한다. 그러기에 무척이나 불확정적이고 불가능한 세계에 도달하고자 분투한다.

IV.
몸의 추상

2007년에서 최근까지 보는 그의 회화는 폭과 길이가 1m-1m50cm가 넘는 대체로 대작들이고, 물감이 두텁게 화면을 채운다. 엥포르멜처럼 실제의 마티에르가 두드러진다. 그 물감의 물성은 화면에 격렬함을 더한다. 그러나 가끔 표면을 얇게 입힌 작업들도 있는데, 그 효과는 수채화처럼 뭉근히 둘러퍼져 있는 것이, 시적 감성을 자아내며 무척 자연스런 표정이다.
그의 회화에는 몸이 전격적으로 개입한다. 제여란의 몸은 에너지의 원천이자 영감의 축이다. 몸으로 그린 회화이기에 그의 작업은 늘 과정중이다. 처음과 끝이 있을 수 없는 게 몸이기에. 몸이란, 신체성이란 역대 화가들이 그렇게도 표면에 포착하고자 했던 꿈틀거리는 실체였다. 몸에는 완결성이 있을 수 없고, 언어로 표현할 서두와 말미가 없는 것이다. 세잔은 색채의 리듬감으로 몸을 섬세히 포착했고, 베이컨은 격렬한 역동성으로 몸을 둘러쳤다. 몸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제여란은 이렇듯 역대 작가들이 고심하는 몸의 깊이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이 작가가 세잔을 맘에 두고 있는가 보다. 이제껏 제여란의 작품을 세잔과 연결시키는 글이 두어 번 있던 듯하다. 말의 표현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직관은 틀리지 않았다. 세잔에서 보는 것은 색채와 형태가 모두 살아있다는 점인데, 다른 말로 감성과 이성이 공존한다는 역설이다. 제여란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두 가지를 절대로 놓지 않고 두 극점을 오가며 균형을 잡으려는 절실한 의지를 보인다. 극점을 한 데 어우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작가가 평생 업으로 삼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제여란은 계속 분투할 것이다. 영혼의 나태함에서 벗어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작가이므로.



동트는 파리의 센느강을 바라보며
2010. 10. 10

전 영 백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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