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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 BOC SU

정복수

<정복수(丁卜洙)의 부산 시절> 전(展)

- 개별자(個別者)로부터 보편자(普遍者)를 지향하는 여정으로서의 회화 -

정복수가 40년 가까이 천착해 온 대상은 ‘인간’이다. 과연 작가는 무엇을 통해 그 ‘인간’에 접근하려 했을까? 예술로서의 회화는 결국 그것이 형상 또는 비형상으로 드러나는 작가 개개의 개성적 시선에 의한 세계와 인간 탐구의 한 영역일 것인데, 그의 인간 탐구에 대한 방법론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전면 소거하고 공통성과 보편성의 지점으로만 차츰차츰 접근해 나가려는 것이었다. 즉 개인들이 지닌 차별화된 고유성이 아닌, 종으로서의 인간 전체의 고유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들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개개 인간들마다 서로 다른 차별화된 요소를 가지고 있기도 한데, 작가들 중 혹자는 각각의 인간들에게서 관찰되는 서로의 ‘다름’에 집중적으로 주목하기도 하지만 정복수의 경우 이와는 달리 작화에서 전체 인간 종족의 ‘같음’이 무엇인가를 주로 겨냥해 들어가고 있다. 북극해에 떠 있는 빙산 중에서 눈에 보이는 부분은 10% 미만에 지나지 않고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전체의 90% 이상이라고 한다. 보이는 부분이 겉으로는 훨씬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기저에서 그 보이는 것을 보일 수 있도록 지탱하고 보지(保持)하는 부분이 실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또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전체 DNA 염기서열의 99% 이상은 공통적이라 한다. 단지 1% 미만의 사소하고도 미세한 차이가 인간들 서로간의 차별, 즉 개별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즉 그는 빙산의 90% 이상, DNA 염기서열의 99% 이상에 해당하는 부분에 주로 관심을 두었던 셈이다.

나이와 성별, 외모와 지식, 재력과 지위 등을 이루는 그 모든 차이들을 전부 다 소거시킨 다음에도 끝까지 남아 있는 어떤 공통항들을 찾아내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신체 자체와 그 신체로부터 일어나는 본연한 생의 의지로서의 그리고 뭉클한 에너지 덩어리로서의 욕망의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몸(body) 그 자체이지 몸의 한 부분인 뇌(brain)가 아니었다. 인간 탐구의 수단으로서 이성이 매개하는 인지의 과정이나 논리성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신체를 통한 감각과 야수성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양된 인간 정신이나 세련된 문명의 산물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이러한 것을 배제시킨 야만의 속성인 폭력과 침탈, 노출과 관능의 문을 열어젖힘으로서 인간의 밑바닥을 여지없이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표현 의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인간의 참 모습이 아니며 오직 모든 것을 헤집어 까발리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모습만이 인간의 진면모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작가의 인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의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조형적 장치로는 서로간의 공격성을 드러내기 위한 표범 가죽 모양의 피부와 서로를 노려보고 해치려는 성난 표정, 들끓는 욕망의 표상인 성기들의 과잉 노출, 그 야수적 육체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음식물들의 통로이자 소화와 배설의 기관인 내장의 구불구불한 형상 등이 쉴 새 없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쓰고 있는 위선의 가면이 아닌 화장을 지워낸 있는 그대로의 맨 얼굴을 상징하면서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들 – 권력, 돈, 섹스 등 – 을 향하는 맹렬한 인간 본연의 몸서리쳐지는 수성(獸性)의 단면들을 꼼짝 못하게 고발하려는 도구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골격근의 운동이 체성신경계(somatic nervous system)를 통해 감각-연합-운동의 3단계를 경유해 수의적(voluntary)으로 일어나는 과정과는 달리, 마치 인간의 의지나 의식과는 무관하게 내장 운동이나 성충동이 자율신경계(autonomic nervous system)를 통해 불수의적(involuntary)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연상케도 하고 있다. 후자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리고 삼키고 배설하는, 곧 몸으로 느끼는 문제와 더 가깝다면 전자는 이럴까 저럴까 따지고 궁리하는, 곧 머리로 생각하는 문제에 더 밀접하다. 전자가 두뇌의 활동에 좀 더 가깝다면 후자는 몸의 문제에 좀 더 밀접하다. 후자는 무언가를 매개해서 발현된다기보다는 매개 없이 즉발적으로 반응하는 쪽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신체 부위인 내장이나 성기가 자유로운 의지의 발동보다는 불가항력적인 충동을 경유해 교감-부교감신경의 협응(協應)과 길항(拮抗)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실은 작가의 회화적 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일종의 신체-은유(body-metaphor)인 것이다. 이는 ‘허기심 실기복(虛其心 實其腹)’이라는 노자(老子)의 한 구절이 의미하는 바처럼, 생각하는 심(心)의 활용을 비우고 감응하는 복(腹)의 활동을 채우라는 뜻이기도 하다.

김 동 화 (金 東 華)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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