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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MIKYUNG

(b.1964~)

마음을 쌓아 세계의 의미를 알아가는 ‘사각형의 신비’


김미경 작가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은 2016년 가을에 선보였던 OCI 미술관의 전시회였다. 캔버스 화면에 절묘하게 앉혀진 물감과 기하학적 배치는 캐나다의 화가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자 놀라운 느낌이 가슴을 쳤다. <북극성(Polaris)>이라고 기억되는 그림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정삼각형보다 절묘하게 예각을 갖추어 하늘과 땅을 안정적으로 떠받치는 ‘북극성’이었다. 다른 쪽 그림의 제목을 살펴보니 <나는 창밖의 바람이고 싶다>라고 적혀있었다. 아그네스 마틴이 그리드와 반복적 팬턴을 이용해서 숭고(sublime)를 말한다면, 김미경 작가는 ‘시적 시간(poetic time)'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아는 작가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시적 시간’은 수직적(vertical) 시간이다. 그것은 일상적 수평의(horizontal) 시간을 초월한 예술 속의 시간이다. <윤동주의 하늘>이라는 시리즈 회화도 기억에 남았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였기에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를 포개고 중첩시켜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차가운 진리 사이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다 이내 고개 떨구어야 했던 위대한 시인의 이미지가 김미경 작가의 그림 속에서 아른거렸다. 화가도 시인처럼 추억과 쓸쓸함과 동경과 어머니를 그림 속에 겹친 것이리라.
‘어머니, 어머니.’ 그 시의 가장 절정을 이루는 계기는 바로 같은 단어를 반복으로 모든 것을 멈추게 한 긴 여운일 것이다. 김미경 작가의 회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를 이루는 것 역시 어머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반려(伴侶)를 잃고 세 자녀를 기르기 위해 “어둡고 좁으며 매우 긴 통로를 헤쳐가야만 했던” 어머니를 견디게 해주었던 힘은 세 자녀였다. 화가는 따라서 그 어떤 것보다도 어머니의 마음을 화면에 표현하기 위해서 1, 2, 3이라는 숫자를 반복해서 썼다고 한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북극성>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천체는 움직인다. 또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 눈에는 모든 천체와 별자리와 별들과 해와 달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일하게 북극성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언제나 자리를 지킨다. 모든 것이 움직였다면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진리나 항상됨[常]에 대한 신뢰를 구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체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그 별을 보면서 절대불변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를 맞아 절멸하며 다시 생성되는 제 1원인으로서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 그것은 하느님밖에 없다. 북극성은 하느님 자리이다. 그것은 우리 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안 하는 것이 없는” 존재와 같다. 문에서 지도리[추뉴, 樞紐]가 그렇고 바퀴[폭, 輻]에서 바퀴통[곡, 轂]이 그렇다. 『老子』 11장: “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

그러한 마음을 붙들고 올해 2020년 11월 5일 오전 10시쯤 문래동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에서 화가를 만났다. 처음에 눈빛을 보았다. 아름다운 별처럼 빛나는 눈빛은 세상의 모든 것을 빛나게 해주는 그런 눈빛이었다. 손을 보았다. 노동하는 손이 아니라 사유하는 손이다. 작은 창가로 온화한 오전의 햇살이 들어 작업실은 마치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그림에 나오는 실내 풍경을 연상시켰다. 햇살의 알갱이가 작고 고와서 작업실의 모든 것을 상세하게 읽어주고 있었다. 베르메르의 실내풍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드로 구성된 현대미술 작품이 가득 펼쳐져있었다는 것이다.
화가는 뉴욕 파슨스에서 공부한 이야기에서부터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예술과 그들의 삶, 서구 철학과 동양사상의 보편성과 차이점, 성(聖)과 속(俗)의 경계, 조선 예술의 위대함,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나오는 인류사적 이야기, 언어적 사유와 시각적 사유, 우리의 청년들 이야기까지 자신이 품는 생각을 때로는 논리적으로 때로는 울림 있는 여운의 은유로 풀어나갔다. 나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화가의 그리드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발적인 의도가 아니었다. 내가 5년 전 가을에 만나 마음에 담았던 느낌이 맞는 것인지 빨리 알고 싶어서 조급했기 때문이다. 화가는 설명했다. 그리드는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드[기하학]는 그리스 세계의 산물이다. 그리드는 올리브기름을 주변국에 수출하기 위해서 항해를 발전시켰고 바람과 돌풍, 물살과 밤낮, 사계절이라는 변화[變]와 차이에 맞서기 위해 개발한 불변과 항상됨[常]을 가정한 가사세계(可思世界)의 총아(寵兒)이다. 이에 반해 어머니는, 가사(可思)의 이지(理智)의 세계와는 다른, 아니 대척점을 이루는 총체적 감수성으로, 나와 연결된 생명 줄이기에, 그리드와 어머니는 상식적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화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통상 두 종류이다. 하나는 자기를 그리는 사람이고 하나는 외부 세계를 그리는 사람이다. 화가가 그린 그림은 통상 두 종류이다. 하나는 화가의 삶이 체현되어 있는 그림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한 그림, 즉 대타적(對他的) 욕망이 개입된 그림이다. 김미경 작가는 어머니를 그린다. 그 어머니는 나를 있게 하고 나를 사유하게 하며 세상과 호흡해주게 한, 시원적 북극성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랑과 존경에 대한 무한한 표현이다. 화가의 어머니는 좁은 가정공간에서 물건을 쌓고 정리하기 위해 보자기를 사용했다. 그리드의 보자기는 물건을 감싸면 명료하고 팽팽한 긴장을 이루던 모습을 이내 누그러뜨리고 여유를 갖추어 안도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김미경 작가는 어머니의 인생을 상징하는 단어 ‘보자기’를 통해서 모더니즘이라는 폭력의 긴장을 대화와 화해의 장(場, field)으로 전치시키는 것이다. 작가에게 어머니는 타인이 아니라 자아의 상징이다. 곧 나의 세계다. 화가의 그림은 내가 강렬하게 개입되어있는 어머니의 역사로 세계를 바라본 그림이기에 외부 세계를 그린 그림인 동시에 나를 그린 것이다. 내가 개입되어 있는 어머니의 역사로 다시 나를 성찰한 그림이기에 나의 삶이 체현되어있다. 그런데 화가의 그림은 어머니의 삶을 북극성 삼아, 또 나와 나의 삶을 지도리[樞紐]와 곡(穀)으로 삼아 외부 세계로 무한히 확산시키는 데 더욱 정밀한 의미가 생성된다.
모더니즘은 대서양 연안의 두 축[유럽과 북아메리카]과 백인, 그리고 남성 이외의 모든 것을 위계의 하부에 방치시킨다. 모더니즘은 남성적이며 유럽적인 사유의 총체적 가치인 이성을 영광의 상층부에 위치시킨다. 이성은 기하학이라는 외투를 입고 세계에 나타나 호령한다. 그러나 화가는 이 날카롭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모더니즘의 이야기를 한국의 언어와 생생한 자기 삶으로 거피취차(去彼取此) 『老子』 12장: “是以聖人為腹不為目,故去彼取此.”
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미학으로 화해시킨다.
화가는 캔버스 화면에 바람ㆍ햇살ㆍ별ㆍ나무ㆍ흙ㆍ도자기ㆍ거울과 같은 외재하는 사물뿐만 아니라 추억ㆍ사랑ㆍ쓸쓸함ㆍ동경과 같은 정서와 세계에 대한 기대, 사람에 대한 애정을 모두 켜켜이 쌓아간다. 왜 그럴까? 세계의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화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세계의 만물을 모두 연결시키는 연원으로서의 이치(principle)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칼 융(Carl Gustav Jung)은 동시성(synchronicity)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것은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어떤 관련이 있는 것처럼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물리적 세계는 인과 관계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시공의 제약을 받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떨어뜨린 컵이 당장 멕시코에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칼 융은 우리의 정신세계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명료하지만 세계의 일부분만을 볼 수 있다. 무의식은 불명료하지만 세계의 전체를 파악한다. 꿈이란 위기나 어떤 필요에 의해 세계의 전체를 직관한 무의식이 의식에 내려주는 신호라고 해석한다. 또 우리는 물질과 물질이 서로 떨어져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식이 우주의 극히 일부분의 차원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고차원의 세계에서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정밀하게 연결되어있다고 한다. 이를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숨겨진 질서(implicated order)라고 부른다.
화가는 보자기를 화면에 그리드로 묘사한다. 그것을 샌드페이퍼로 정밀하게 갈아낸다. 다시 어머니와 가졌던 추억의 대상을 올린다. 다시 샌드페이퍼로 갈아낸다. 격자의 창살을 다시 올려 갈아내고 조선과 고려의 도자기 빛깔, 자연의 유려한 색을 올려서 다시 갈아낸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울적한 블랙 스카이를 올리기도 한다. 다시 갈아낸다. 나중에는 손으로 직접 간다. 그래서 최초의 층과 마지막 층의 선후가 없어지고 시간의 전후가 사라지게 된다. 그림 속에서 시공의 제약 조건은 사라지고 정신세계의 이어짐이 무한하게 펼쳐지게 된다. 따라서 김미경의 회화는 무한으로 경주하는 느린 걸음이지만 결국에는 무한에 도달하기 위한 영원한 과정의 도야(陶冶)이다.
화가와의 대화에서 『중용(中庸)』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27장에 나오는 말이다. “뜻있는 사람[君子]은 덕성(德性)을 존중하며 묻고 배우는 것에 말미암으며 광대함을 지극히 하고[致廣大] 정미함을 다하며[盡精微] 고명함을 다하면서 중용의 길을 간다.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후함을 돈독히 하여 예(禮)를 숭상한다.” 『中庸』 27장 “君子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여기에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가치가 아홉 가지로 압축된다. 그중 김미경의 회화 세계는 적어도 세 가지 가치와 직접적으로 만난다. 하나는 광대함을 지극히 한다는 ‘치광대(致廣大)’이다. 이것은 편재(遍在, ubiquity)라는 뜻이다. 있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이다. 화가는 신변에서 만나는 가까운 사물에서 시작하여[近取諸身] 세계의 항상된 진실까지 나아간다[遠取諸物]. 또 하나 정미함을 다해낸다. 즉 ‘진정미(盡精微)’의 절실함을 매일 모든 곳에서 이루어낸다. 이것을 할 수 있는 화가의 힘은 지나간 과거와 다가오는 미래를 모두 포용하고자 하는 작가의 숭례(崇禮)의 삶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시리 허스트베트(Siri Hustvedt)의 표현대로, 작은 사각형이지만 불가사의한 의미로 가득한 ‘사각형의 신비’이다.


이진명,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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