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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SCHOONSU

(b.1957~)

청색의 개념 The Concept of Blue

김춘수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푸른 하늘 아래 존재하는 인류의 역사를 반영하듯 청색은 세계 모든 문화에서 중요성을 가지는 색이다. 430∼500nms 사이에 파장 범위에 놓여 있는 청색은 보편적으로 청량하거나 신선한 인상을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색조가 약간만 첨가되더라도 그 인상이 훼손되기 쉬운 순수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김춘수의 작업은 우리를 푸른 하늘 같은 청명하고 순수한 청색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의 화면은 날것으로서의 흰색 바탕부터 순수한 청색 자체에 이르기까지 청색의 모든 스펙트럼을 역동적인 방법으로 펼쳐놓는다. 때로는 번지듯 스며들어 있는 투명함으로, 때로는 시선의 침투를 강한 밀도로 거부하는 완강함으로 그의 청색은 화면과 관객이 만나는 표면 위에서 긴장의 최대치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회화사에 있어서 청색의 이러한 운용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이브 클라인은 YKB, 즉 이브 클라인의 청색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보다 어둡고 입자성이 강한 청색을 모든 종류의 대상의 표현에 폭넓게 사용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청색이라기보다는 그것 자체로 다른 청색들과 차별성을 지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색에 대한 미각을 보다 미분화하는 양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김춘수의 청색의 고유성은 색 자체에 있기보다는 작가의 회화적 표현에 의한 운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둘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 둘 모두 청색을 개념적인 표상으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브 클라인이나 김춘수의 청색 모두 묘사적인 가치나 서술성을 배제한 채 개념적인 확신에 의해 선택되었다. 이브 클라인의 경우 YKB는 주제나 대상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청색 자체로서의 가치는 거의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김춘수의 경우 청색의 개념과 가치는 회화적인 제스처와의 긴밀히 얽혀 있다. 그의 작품에 있어 화면 자체의 순수성, 세계에 대한 묘사나 대상의 재현을 통하지 않고 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순수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때 회화는 그 자체가 주제가 되고, 청색은 그 주제를 드러내는 주된 개념이 된다.

물론 청색이 불러일으키는 어떠한 연상적인 가치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청색은 하늘, 바다 등의 실제적 대상으로부터 칸딘스키의 정신성, 진실성과 청렴, 중국의 영생, 우주, 또한 ‘blue flower’에서 보여지는 낭만주의적 개념,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 등으로 구성되었던 Blauer Reiter그룹의 ‘blue rider’에서 보여진 표현주의 등 많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칸딘스키는 1910년에 쓴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청색은 그 색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사람들을 더욱 초자연적인 곳으로 이끄는 훌륭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청색이 확보하고 있는 정서적 깊이감에 대한 설득력 있는 지적이다. 청색은 근본적으로 공명이나 조화 등의 정서와도 연관이 깊다.

청색에 대한 이러한 가치들 역시 김춘수의 작업에 반영되어 있으며, 기존의 선례들 그 이상을 그의 화면은 담고 있다. 김춘수 회화의 성격을 설명함에 있어 또하나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제스처’이다. 그러나 서정적 추상으로 분류되는 추상 표현주의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제스처는 세계에 대한 적의나 심리적 혼란에 시달리는 개인의 내면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제스처라는 것은 회화작업의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거의 모든 화가들이 크고 작은 동작을 통해 화면을 채우며 일견 통제에서 벗어나 보이는 거칠고 무작위적인 물감의 흔적들을 운용하고 있다. 잭슨폴록의 경우, 작가의 의지나 심리에 의해 서라기보다는 물감의 유체적인 역동성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개인성이 억제된 제스처를 취한다.

잭슨 폴록이 떨어지는 물감들의 순수한 자취에 초점을 맞춘 비개인적인 제스처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면, 김춘수의 작업은 보다 인간성이 반영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인간적이면서도 어쩐지 표현적이지는 않은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김춘수의 작업이 표현적이라기보다는 명상적인 까닭이다. ‘명상적’이라는 개념은 기운이나, 열정의 기운이나 열정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과 기氣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자료를 조금만 찾아본다면 그 둘 사이의 긴밀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김춘수의 기는 억제되어 있고 제어되어 있으며 고도의 집중력에 의해 발휘된 기운이다. 정복된 기. 이 기운 속에는 긴장감의 최대치에서만 가능한 울림이 있다. 김춘수의 작업이 분명 시각적인 음악성, 순수 청각에 가까운 음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관객이 작가가 작품 속에서 형성해 놓은 기운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고양된 기운을 지니고 있고, 둘 사이에 상호적으로 파생되는 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관객은 화면 위에서 이 음악적 기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작가와 관객의 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은 비형상적 세계로의 미학적인 여행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김춘수 역시 잭슨 폴록처럼 몸짓으로서의 제스처를 그의 작업의 주제로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춘수는 보다 개인적이고 정력적인 제스처를 통해 작가와 관객 모두를 의식의 질서와 고양된 수준의 미학적인 가치를 경험할 수 있게 하며 그 둘의 현존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Gerhard Charles Rump (베를린 공과대학 미술사 초빙교수, 독일 Die Welt 예술부 편집부장)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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