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OR PAUSE_Nak Beom KHO
번역과 재구성으로서의 회화
고낙범의 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번역translation과 재구성을 기반으로 한 개념작 작업이다. 이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 진행된 일련의 ‘뮤지엄 프로젝트’들 -<뮤지엄 Museum>,<무제 퍼스널 MUSEē Personnel>, <초상화 미술관> 시리즈-과 2000년대 초 중반에 진행된 영화, 공연의 화화적 번안 작업에서 읽혀진다.
80년대 말 소그룹 ‘뮤지엄’의 활동과 90년대 전반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6년 큐레이터 경력을 암시하는 고낙범의 초기 ‘뮤지엄 프로젝트’에서는 명화의 선택, 분석, 번역, 재구성이라는 일종의 해석과 번안의 프로세스들이 개입되어 있다. 뮤지엄의 어원으로서의 뮤즈Muse를 개념적 기조로 한 <MUSEē Personnel>은 나란히 배열된 두 개의 작품 사이의 유비적 관계에서 그 의미가 생성된다. 왼쪽에는 복제된 명화의 전체 혹은 부분의 이미지가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명화 내 색채의 요소들을 작가가 눈으로 스캐닝 하듯 시각적으로 분석하여 여러 색들로 환원시킨 수평의 색띠들이 배열된다. 직관적인 색채 감각으로 ᄈᆞ르게 선택되고 치환된 명화의 색가(色價)들은 일종의 추상화된 색채 정보들인 셈이다. 시간과 역사를 관통하는 미술사의 이미지들이 수평의 띠로 재배열되면서 수직의 시간 축이 순간 멈춘다. 즉 수직적이고 연대기적인 통시적 축이 수평적이고 공시적인 수평적 축으로 바뀌면서 작품들은 무시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수백 점의 색띠로 전치한 명화들은 어찌보면 작가의 논리와 언어적 개념에 기반하여 미술사에 존재하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큐레이팅 한 가상의 미술관과도 같다. [...]
복잡계의 표상으로서의 회화
수직과 수평의 색띠 작업과 초상화 시리즈를 거쳐 2000년대 중반이후 현재까지 작가는 사선(斜線)의 감각과 시각성을 보여주는 기하학적 추상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수평 수직의 개별적인 색의 단위들이 복잡하게 연결된 오각형과 원의 기하학적 단자들로 확장되고 색채들 간의 상호작용 또한 더욱 복잡해져 화면에 유연한 흐름과 운동감을 형성하는 것이 이 시기 작업의 특징이다. 작가에게 있어 질서와 조화, 이성적 논리를 강조하는 수직 수평의 세계가 상징계로 의미화 할 수 있고 인식 가능한 체계라면, 사선의 세계는 명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의미의 차원들이다. 이는 감성적인 차원에서의 멜랑콜리아의 세계이며 복잡하게 얽혀있는 신체의 유기적인 상황이나 끝없이 생성하고 쇠퇴하는 에너지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 복잡계이다. 중력이라는 단단한 그물망에 의해 견고하게 자리 잡은 수직 수평의 체계에 반해, 사선으로 향하는 복잡계는 중력에서 일탈한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무중력의 자유로운 상황을 공유한다. 이 시기 대표작들인 <견고한 흐름 Solid Flow>, <피부 Skin>, <모나드 Monad>, <셀 수 있는 혹은 셀 수 없는 Countable or Countless>등이 모두 어딘가로 향하거나 떠다니는 부유성과 유동성, 복잡성과 무한한 확장감을 전달하는 것도 바로 사선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기반 한 것이다.
사선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색의 변주와 상호작용 속에서 무수히 많은 오각형이나 원이 중첩되고 퍼져나가는 형태로 시각화된다. 사선의 감각을 의미화 하는 것으로 작가가 주목한 기하학적 형태는 바로 오각형이다. 이는 나팔꽃의 형상을 한 <모닝글로리 Morning Glory>(2007)에서 출발하여, <견고한 흐름>(2007), <피부>(2009-2010)등으로 이어지는 사선과 오각형의 변형체로 제시된다. 제목에서 연상되듯 신체 일부분이 수축하였다 이완하는 유기적 상황을 암시하는 <모닝글로리>와 함께 <피부>는 무수한 생식세포와 유전자 서열, 그리고 생명의 에네르기 등 생명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새로운 조합과 해체를 떠올린다. 유기적 생명의 에너지와 단자들의 무한한 중첩은<모나드>와 <셀 수 있는 혹은 셀 수 없는>에서는 사각의 캔버스에 대항이라도 하듯 원형의 색점들이 집중과 확산을 반복하며 우주와도 같은 무한한 공간으로 파생하여, 단자들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수직 수평의 체계를 거스르며 시작한 오각형과 원의 접합과 연결들은 복수성과 에네르기, 그리고 수많은 특이점들을 만들어낸다. 이는 어디에서 끊기 어려운 무한히 계속되는 중첩구조인 들뢰즈 식의 주름과도 닮아있으며, 또한 연속과 불연속의 계기를 동시에 포함하는 접힘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명확하게 대상을 규정하지 않는 무수한 색채 단위의 집적과 겹침은 잉여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혼성과 변이의 공간 구조를 강화시킨다.
고낙범 회화에서 기호화 될 수 있는 층위와 그렇지 못한 층위가 있다면, 전자는 명화를 색띠로 구성하거나 이를 다시 단색조의 초상화로 환원시킨 ‘뮤지엄 프로젝트’일 것이고, 후자는 바로 연쇄와 접합, 무한성과 복합체를 드러내는 <견고한 흐름>, <스킨>, <모나드>일지도 모른다. 고낙범 회화의 묘미는 바로 논리와 비논리,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 사유와 감각이 충돌하고 공존하여 의미의 중층구조를 면밀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우리의 인식체계를 뒤흔들고 불한정한 인간추체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데 있을 것이다.
배명지 (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