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 BYUNG SO
b.1943
균형과 근본을 향한 회화적 긋기
검은 흰, 행위와의 대화. 어찌 보면 이 전시의 제목은 검은 긋기 사이에 개입된 묘한 여백을 읽는 ‘최병소’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수식어 같다. 우리는 그의 노동집약적 예술 행위에서 숨이 멈추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얇아질 대로 얇아진 닳아서 찢긴 형상들은 바닥까지 경험한 인간존재의 허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예전 전시에 동행했던 한 인류학자는 최병소의 작품을 보고 “불에 타 재가 되어 버린 바스라진 고대문명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평했다. 1943년생, 이미 여든에 다 달은 작가는 한국전쟁의 참혹함, 70년대 유신체제의 감시, 퇴폐풍조가 유행하던 시기의 현실 속에서 권위에의 저항을 지우는 행위로 극복해왔다. 다양한 실험미술을 거치면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와 하나의 방법론으로 평생을 일관해온 것은 시대정신을 자신의 행위성과 일치시켜온 까닭이다. 이런 작가에겐 그 어떤 유행이나 사회적 사건들이 작품세계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극대화된 반복행위를 일상의 오브제 위에 그어낸 은둔하는 작가, 우리는 하나의 방식을 고수한 최병소 작가에게 하나의 의문점을 갖는다. 왜 하나의 방식을 고수했을까. 대구미술계의 거장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일컬어 왔지만, 이미 최병소는 동시대 한국 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꼽힌다. 신문을 덧칠하거나 연필 볼펜 등으로 그으면서 얇은 종이의 두께에 개입하는 행위는 오랜 기간 자신의 심상과 마주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한때 단색조 회화로 분류되었지만, 하나의 사조로 설명하기엔 행위하는 동시에 존재가 되기에 ‘최병소만의 장르’로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그가 현대미술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지점은 어머 어마하다.
전시를 위한 인터뷰에서 딸인 최윤정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버지는 평범함을 중시하는 겸손함을 갖췄다. 항상 책을 읽고 공부하는 열정이 있다. 부풀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대로 보여지기 바라는 성실함을 추구한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할 수 없는 70년대부터 이어온 작업, 세계 어디에도 없는 철학적인 사유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평론글 <검은, 흰 : 행위와의 대화> 중에서
최병소(1943~ ) 작가는 동시대 사건의 집합체인 신문을 ‘지우고 채우는’ 작업을 통해 자기 흔적(uniqueness)을 부여한다. 흑연으로 선을 그어 동시대 서사를 지워나가는 행위는 ‘신문이 가진 정보성(동시대 보편성)’을 작가의 개성으로 대체하는 ‘문명에의 저항’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최병소 스타일(Choi Byung-so's style)’은 실제 양식(Style)의 어원인 첨필(尖筆: stylus/ stilus: 필기용 철필)과도 연관되는데, 고대 로마에서 사용하던 ‘쇠로된 침 모양의 필기구인 스틸루스(stilus, m.)’를 활용한 ‘원형으로의 복귀’로도 해석된다. 첨필로 표현된 글은 일종의 문체(文體)이자 삶의 방식이므로, 작가는 신문이라는 보편 서사를 지우고 ‘자기만의 행위적 문체’를 획득함으로써 선에서 스타일을 찾는다. 신문지와 연필 외에도 테이프, 옷걸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최병소의 작품들은 일상과 예술의 밀착형 언어이자, ‘비주류의 복귀’라는 측면에서 예술정신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졸업 후 고향 대구로 내려가 작업을 이어간 최병소가 2011년 대구미술관 개관 특별전을 계기로 주류화단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우고 채우는 가운데 의미를 찾는 허실상생(虛實相生)의 동적 기세(氣勢)라고도 해석 가능하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평론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