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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MI KYUNG

b.1964

<흰, 그리고 잇다>

처음에는 색층이 보인다. 겹겹이 쌓인 숫자와 기호들. 그러나 오래 서서 바라보면, 그 표면 너머에서 무언가 접히고 펼쳐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어린 날의 보자기와, 그 위에 쌓아 올린 돌탑의 침묵이 만나는 기억이다. 방 한구석에 포개어 두었던 어린 날의 보따리와, 산길 굽이마다 누군가 쌓아 올린 돌탑. 하나는 안으로 접히는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밖으로 솟는 바람이다. 작가의 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쌓아 올리는 행위와 연결하는 행위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작업.” 보따리는 감싸고, 접고, 숨긴다. 안으로 스며들며 내면을 만든다. 반대로 돌탑은 올리고, 드러내고, 버틴다. 바깥을 향해 서서 의지를 세운다. 김미경의 손은 늘 이 두 방향 사이를 오간다. 작가는 ‘안으로 접히는 보자기’와 ‘밖으로 솟는 돌탑’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한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단순한 시각적 병치를 넘어 내적 경험의 변증법을 펼쳐 보인다. 여기서 보자기는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유년의 보자기가 ‘슬픔과 고통, 싫어하는 마음’을 싸안는 감춤의 도구였다면, 인사동에서 마주한 조각보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 펼쳐짐의 대상이다. 동일한 대상이 경험의 층위에 따라 극단적으로 상반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지점에서, 작가의 내면은 모순을 품게 된다. 이 모순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며, 바로 여기서 시적 긴장이 발생한다.

작가가 색층을 쌓아 올리는 과정을 돌을 하나하나 쌓는 행위에 비유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시간의 누적, 정성의 축적, 의미의 중첩을 상징한다. 돌탑은 위로 솟아오르는 형상이지만, 그 기저에는 쌓아 올린 자의 오랜 응시와 반복된 행위가 자리한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보자기와 돌탑이 만나는 과정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순적이었던 것은 보자기에 대한 나의 감정이었다.” 이 고백은 작업의 핵심을 관통한다. 작품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화해는 두 이미지 사이의 조화가 아니라, 작가 내면에 존재했던 모순적 감정들이 ‘묘한 고요’ 속에서 통합되는 과정이다. 그 만남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순을 품은 채 서로를 받아들이며 서서히 완성된다. 작가의 노트에 반복되는 “펼치다, 다듬다, 연결하다, 쌓아 올리다” 같은 동사들은 그의 작업이 사유 이전에 손의 리듬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보자기가 상처와 기억을 수평으로 펴서 잇는다면, 돌탑은 흩어진 사연들을 수직으로 밀어 올려 하나의 기도를 세운다. 두 축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작품은 조금씩 자라난다. 화해하지 못한 것들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태어난다. 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 끝에 한 몸이 되어가는 과정, 어쩌면 김미경의 ‘작업’은 바로 그 느린 성장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결국 김미경의 작업은 우리 자신과 세계, 그리고 우리가 속한 우주를 조금씩 이어 맞추어 가는 과정이다. 접히고, 펴지고, 쌓이고, 흩어지는 시간을 통과하며 비로소 모습을 얻는다. 수직과 수평, 내면과 외부, 기억과 문명, 개인의 서사와 우주의 질서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오늘도 조각들을 잇고 또 잇는다. 모든 것을 품은 듯한 백색은 무한대의 지평을 열어 보이며, 절제와 담백함 속에서도 결코 단단함을 잃지 않는다. 백자를 빚어낸 도공들이 숙고와 상념의 시간을 견뎌냈듯, 작가 또한 수많은 색층을 쌓는 시간을 견뎌낸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인 자리에서 흰은 비로소 모든 색을 품은 빛으로 호흡한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평론글 <흰, 그리고 잇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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