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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ON JAE NA
b.1986
권재나의 작품들은 회화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과거부터 이어져 온 작업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작가의 고민이 지속적으로 공간에 천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10년에서 2012년 무렵까지 이어진 팝업(pop-up) 형식의 작업들은 회화적 추상의 세계가 어떻게 현실로부터 돌출된 공간을 창조하거나 혹은 현실의 공간으로 침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들은 사실상 고정되어 있지만, 팝업 북이나 접이식 부채처럼 여러 면이 겹쳐지며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형식을 활용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작품이 점유하는 공간을 유동적인 것으로 상상하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이 형식은 각 면들이 경첩으로 연결되는 접점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며, 이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작품은 완전히 자유로운 추상적 공간을 표상하는 데에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 후에 이어진 장소 특정적 조각 작품들은 작품이 점유하는 공간 안에 추상의 세계를 창조하기보다는 전시장이라는 장소 자체를 변형시켜 관람객들의 새로운 지각적·신체적 경험을 유도하려는 노력이다. 2014년 벽 자체를 3차원의 구조물로 보고 조형적 변형을 가한 <Wall Building>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실험은, <Fold, Illuminated>(2019)에서는 벽에 붙어있는 평면을 구부리고, 띄우고, 세우거나, 바닥에 떨어뜨리고, 또 천장에 붙이는 형태로 실현된다. <Wall Building>의 구조물이 자신이 속한 공간 전체에 대한 관람자의 지각 경험과 긴장 관계를 이루는 반면, <Fold, Illuminated>에서 관람객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 안으로 돌출되어 있는 구조물 하나하나와 좀 더 개별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 각각의 구조물에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고, 멀어지는 감상자는 피사체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활동에 좀 더 집중하게 되며, 물성을 가지는 미술 작품과 상호 작용할 때 일어나는 시각 경험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작품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상적 움직임에서 벗어난 지각 작용과 신체적 활동을 유도하고, 나와 몸,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환기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는,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 형태의 작품들에서 추상 회화의 시각적 효과와 결합을 이루게 된다. 겹쳐 그은 붓자국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종이를 잘라 접은 콜라주 같기도 한 이 작품들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 그 어딘가의 위치를 점한다. 작품은 좀 더 벽에 납작하게 붙어 평면에 가까워졌지만, 그 모양은 투명해져버린 사각 캔버스의 형태에서 벗어나 있으며, 옆면은 일반적인 캔버스가 갖는 엣지를 거부하고 서서히 벽면으로 둥글려져 작품의 물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동시에 접혀 있는 종이 콜라주 같은 모습은 그 면들 사이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움직임을 내포하여 고정된 물체의 특성에서 벗어나려 하며, 좀 더 떨어져 보았을 때는 마치 한 번에 그은 붓자국처럼 지각됨으로써 추상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를 떼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추상 회화에서 발견되는 붓자국들은 개별적으로 캔버스를 부여받음으로써 그 각각의 붓질 안에 내포된 형식적 고민과 아름다움이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는 또한 여러 안료들을 실험하는 과정을 통해 직접 만들어낸 색을 사용하는데, 이를 통해 각 붓질의 독자성이 한층 더 강조된다. 각각의 셰이프드 캔버스가 가지는 다양한 형태와 색은 작가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경험, 기억, 감정, 인상,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무의식이 긴 시간 동안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증류과정을 통해 추출되어 형식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붓자국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를 필두로 한 모더니즘 비평가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통해 신화화되었으나, 그 후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이 그 물성에 주목하며 그 신화 또한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붓자국 안에 담긴 형식적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이 불러내는 우리 내면의 감정들까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특히 권재나는 셰이프드 캔버스를 통해 역설적으로 붓자국의 물성을 그러한 미적 경험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로 활용한다. 관객들은 회화도 아니고 3차원의 조각도 아닌 중간적 위치를 점하는 이 응축된 요소들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고, 만나며, 이들과 체험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요소들이 살아 숨 쉬는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권재나는 긴 탐색의 과정을 거쳐 다시 회화 평면으로 돌아가, 이를 모든 현실적 제약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관계맺음의 공간으로 제시한다. 이 회화 평면에서 관객들은 셰이프드 캔버스의 형태로 맞닥뜨렸던 붓자국들이 유영하는 추상의 무대를 만나게 된다. 작품 속 공간은 보편적 세계에 대한 은유나 해석, 작가의 철학적 신념이 담긴 붓질, 또는 끊임없는 수행성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작가가 개별자로서 세계를 경험하며 응축한 미적 요소들로 구성된 사적 세계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고, 색의 폭발이 있고, 붓자국과 종이 콜라주처럼 보이는 면들이 뒤섞여 있고, 녹아드는 색채와 겹겹의 층들이 만들어내는 깊은 공간이 있다. 여기에 초대된 관객들은 작품이 만들어낸 무대로 진입하며 그 요소들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제각기 관계를 맺는다. 작가는 세계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내리고 붓자국을 그 행위로서 화면에 새기거나 압도적인 시각적 자극을 통해 관람객을 에워싸기 보다는, 붓자국이 마치 배우처럼 살아 움직이는 무대 안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과정을 통해 관람자 개개인과 접속을 시도하는 것이다.
접속의 장소로서의 회화 (독립큐레이터 이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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