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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 JONGJU

b.1971

윤종주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형상을 좇는다고 했다. 수사적 표현으로 보고 지나칠 수도 있겠으나, 작가의 경우에는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보다는 애매한 것, 경계가 설정된 것보다는 경계 위 혹은 바깥에 있는 것에 경도돼 있고, 그로부터 작가의 회화에 고유한 아우라를 얻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작가의 감각 촉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형상에 맞춰져 있다. 잡히는 형상과 잡히지 않는 형상 사이에 맞춰져 있다. 그렇담 여기서 잡히는 형상은 뭐고, 잡히지 않는 형상은 또 뭔가. 여기서 형상을 의미의 몸 그러므로 의미체로 본다면, 형상을 의미로 대체해도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잡히는 의미와 잡히지 않는 의미 사이에 있다. 그렇담 다시, 잡히는 형상 그리고 의미란 뭔가. 알만한 형상, 빤한 의미, 체제순응적인 상투어(doxa), 스테레오타입과 자기동일성의 논리, 그리고 안 봐도 비디오인 클리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형상 그리고 의미란 동시에 잡을 수 없는 형상이며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게 뭔가. 공이고, 허고, 무다. 표현 혹은 재현 불가능성이며, 인식론으로 치자면 불가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잡히는 것에서 잡히지 않는 것 쪽으로 움직이고 있고, 잡히는 것의 부정을 통해 잡히지 않는 것을 긍정하는 기획, 그러므로 어쩜 불가능한 기획(잡히지 않는 것,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기획)을 수행하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예술의 특수성이 여기에 있고, 예술의 돌파구가 여기에 있다. 비록 인식론으론 불가능한 기획이지만, 감각을 도구로 하는 예술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게 뭔가. 암시의 기술이다. 인식할 수 없지만, 암시할 수는 있다. 인식할 수 없는 것, 인식 바깥에 있는 것을 암시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렇게 폴 클레는 예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무정형을 통해 정형을 타파하려 했고, 모리스 블랑쇼는 의미의 바깥에 의미를 세우려 했다. 바로 비가시적인 것, 유령, 무정형, 그리고 의미의 바깥에서 예술의 존재의미를 본 것이다. 빤한 의미에서 빤하지 않은 의미를 구제하고 복원하는 일에서 예술의 실천논리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빤한 의미는 없다고(다만 그렇게 보일 뿐)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 애매한 것, 경계 위 혹은 바깥에 있는 것에 경도된 작가의 작업은 이런 예술의 존재의미며 실천논리에 맞닿아있다.


고충환(미술평론가)의 <윤종주, 얼룩 그러므로 어쩜 무정형,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기도 한 > 평론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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