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점: 재구성된 서사
2026. 8.27. - 10. 3.
권오상, 죠셉 초이
두 개의 변형선
권오상, 죠셉초이 — 《항복점: 재구성된 서사》
항복점
재료역학에서 항복점(yield point)은 물체가 부서지는 지점이 아니라, 탄성에서 소성으로 넘어가는 문턱이다. 이 문턱을 넘어선 물체는 파괴되는 대신 이전의 형상으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소성 변형(plastic deformation)—으로 이행한다. 탄성이 ‘견딤’의 언어라면 소성은 ‘이행’의 언어다. 이 지점을 지난 물질은 부서진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것이다.
권오상과 죠셉초이가 다루는 것도 이 문턱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매체로 작업하지만, 견고한 원본이 예술적 개입을 통과해 되돌아갈 수 없는 다른 실재로 건너가는 순간을 공통으로 붙든다. 사진은 조각이 되고, 기억은 이미지가 된다. 두 개의 변형선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지만 같은 문턱을 지난다.
권오상 — 표면의 소성 변형
1998년 시작된 〈데오도란트 타입(Deodorant Type)〉 이래, 권오상의 조각은 덩어리와 무게라는 조각의 오랜 전제를 정면으로 배반해 왔다. 대상을 수백 장의 사진으로 분절해 촬영한 뒤 낱장의 인화지를 가벼운 구조체 위에 이어 붙이는 방식에서, 형상은 재료의 저항과 맞선 끝에 남는 것이 아니라, 파편의 재조합을 통해서만 비로소 입체가 된다. 사진들은 이음매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겹치고 어긋나며 표면을 이루고, 그 흔적이야말로 ‘형상이 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물질에 새겨 넣은 결과다.
추상을 향한 감각은 그의 작업에 오래 잠재해 있었다. 형상을 흩었다가 다시 세우는 방식 자체가 이미 형태를 한 번 풀어 놓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020년 이후 그 감각은 인체의 윤곽마저 놓아 버린 추상적인 사진조각으로 전면에 나서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구멍이 있다. 헨리 무어와 문신(文信)의 조각에서 그가 발견한 구멍은 결여가 아니라 통로다. 안과 밖, 앞면과 뒷면을 이어 주는 길이자 조각 내부의 공간이다. 작가는 여기에 아시아 정원의 태호석을 겹쳐 본다. 물에 씻겨 구멍이 뚫린 그 돌을 두고 용이 지나는 길이라 불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 그에게는 전환점이었다.
〈Wind Hole Relief〉는 작고한 전 세계 유무명 조각가들의 작업에서 구멍 부분만을 찾아 모아 부조로 옮긴 작업이다. ‘바람이 지나는 길’이라는 우리말 제목에서, 용이 지나던 자리를 이제 바람이 지난다.
〈Helmet Head〉는 무어의 같은 제목 연작에서 형태를 빌려 왔다. 광부였던 무어의 아버지가 탄광에서 나와 고글을 벗으면 눈만 남고 나머지는 온통 검게 덮여 허공처럼 보이던 장면에서 비롯한 형태다. 내부의 허공이 넓은 만큼 껍질과 빈 공간이 팽팽하게 맞서는 이 형태 위에, 권오상은 자신이 좋아하는 오토바이 헬멧을 겹치고 여러 인물의 사진을 쪼개 붙여 하나의 얼굴을 만든다. 속은 비어 있고 표면만이 이미지로 가득한 조각. 실재와 가상이 정교하게 중첩된 그의 세계가 여기에 압축되어 있다.
데본렉스 고양이와 보르조이 흉상은 이 문법이 가장 사적인 자리로 내려온 결과다. 최초의 사진조각이 친구의 흉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2012년 투병 중이던 친구의 아버지가 손자에게 남길 기억으로 제작을 의뢰했던 경험은 작가에게 사진조각의 메모리얼한 기능을 자각하게 했다. 가장 가벼운 재료로 지어졌음에도 사라짐에 저항한다는, 조각의 오래된 임무다. 같은 해 개인전에서 사람의 얼굴만 늘어선 자리가 무거워지자 그 사이에 동물을 놓은 것이 이 계열의 시작이었고, 그 기능은 이번 두 점 앞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죠셉초이 — 기억의 소성 변형
권오상이 외부의 대상을 물리적으로 재구성한다면, 파리를 거점으로 작업해 온 죠셉초이는 내면에 잠재된 이미지를 정신적으로 재구성한다. 경험을 더듬어 다시 세워지는 이미지들은 나란히 나열되기도 하고, 고대 양피지 문서인 팔림프세스트처럼 지워지고 덧그려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리는 몸의 행위가 앞서고 사고가 뒤따르는 이 방식에서 형상은 계획된 결과가 아니라 그리는 도중에 도착하는 것이며, 작가는 그것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이 태도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이번 신작의 대부분은 〈Figure〉에 번호가 붙은 것이 전부이고, 종이 작업은 그 앞에 〈Study〉가 붙을 뿐이다. 화면에 이름을 붙이는 일 자체를 유보한 셈이다. 대신 반복되는 것은 사물들이다. 사다리와 나선 계단, 지팡이, 얼굴에 대어 보는 가면, 손에 받쳐 든 검은 구체, 품에 안긴 흰 가슴 조각. 이야기를 지시하는 상징이라기보다, 매번 다르게 배치되는 몸들을 받아내는 무대 장치에 가깝다. 그 무대 위에서 몸은 좀처럼 하나로 확정되지 않는다. 〈Figure N.50〉에서 흰 천에 감싸인 채 얽힌 몸들은 포옹인지 결박인지 끝내 판별되지 않고, 〈Figure N.51〉과 〈Figure N.53〉에서는 하나의 몸 위로 여러 얼굴이 포개져 하나의 머리를 이룬다. 〈Secret family N.2〉에 이르면 크기의 논리마저 무너져 거대한 몸과 작은 몸이 위계 없이 공존한다.
같은 얼개가 매체를 건너 다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목탄과 파스텔로 그린 〈Study figure N.49-1〉과 캔버스 회화 〈Secret family N.2〉가 그렇다. 종이 위에서 형상들의 경계는 아직 흐릿하게 번져 있고, 캔버스 위에서 같은 형상은 색면으로 굳는다. 지워지고 덧그려지기를 반복한다는 그의 방식이 한 화면 안에서만이 아니라 매체를 건너서도 작동하는 셈이다. 명확한 재현을 포기하는 대신 형상이 도착하고 지워지고 다시 도착하는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태도야말로, 그의 화면이 기억이라는 유동적 실체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좌상 — 두 개의 변형선이 처음 겹치는 자리
전시의 한편에는 두 작가가 형식을 주고받은 좌상이 놓인다. 몇 년간 와상을 제작해 온 권오상은 앉은 형상으로 관심을 넓혀 가던 중, 죠셉초이가 그린 추상적인 인물에서 무어를 비롯한 근대 조각가들의 형태와 겹치는 지점을 발견했다. 출발점이 된 것은 한 인물이 옷 위로 가슴 조각을 안고 있는 장면이다. 무어의 조각에 같은 자세가 있어 그 형태를 함께 가져왔다. 회화 속 인물이 안고 있던 조각에서 실제 조각이 태어난다는 점에서, 형식을 매개로 한 이 협업은 시작부터 매체 간 이행의 구조를 품고 있었던 셈이다.
사진조각의 표면 위로 죠셉초이의 붓질과 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도록 설계된 이 좌상에서, 몸의 움직임이 사고를 앞서는 즉흥적 붓놀림은 수많은 사진 조각을 정교하게 계산해 조립한 표면 위에 얹힌다. 계산된 표면 위에 계산되지 않은 손이 얹혀 한 몸을 이룬다.
돌아가지 않는 형상
소성 변형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상실의 다른 이름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항복점을 넘어선 물체는 원래의 형상을 잃지만, 바로 그 상실을 통해서만 이전에 없던 질서를 얻는다.
권오상의 조각에서는 평면과 입체, 실재와 이미지를 갈라 놓던 경계가 임의적인 합의였음이 드러난다. 죠셉초이의 화면에서 기억은 저장된 것이 아니라 소환될 때마다 다시 그려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쪽은 대상을 흩어 다시 세우고, 다른 쪽은 형상이 굳기 전의 상태를 붙잡는다. 방향은 반대지만 두 사람이 도착한 자리는 같다. 익숙한 형상이 무너진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얼굴이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