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흑·연(黑·挻)

최병소 김은주 윤상렬 편대식

2024. 8. 29 - 10. 3

흑·연(黑·延), 검은 깨달음_Black Transcendence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아트프로젝트 씨오(대표 임은혜)는 동시대 미술의 확장성을 기획전시의 중심에 둠으로써, 갤러리와 작가의 관계를 ‘자본가치(Capital value) 너머에 있는 새로운 발견(Extend new meaning’으로까지 연결한다. 2024년 가을을 여는 전시 《흑·연(黑· 延)》은 일차원적 재료로서의 흑연(黑鉛: Graphite, Plumbago)을 가로지른 작가 정체성을 확장(늘릴 연: 延)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최병소·김은주·윤상렬·편대식은 ‘외연과 정신의 종합’이라는 측면에서 흑연(黑鉛)을 재료로 삼되 ‘확장적 깨달음’을 작업 태도로 삼아 재료를 초월한 ‘존재의 깨달음’으로까지 작품을 확장한다.

‘검은 색을 내는 재료(Black lead)’로서의 흑연은 탄소 동소체의 일종으로, 연필심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며 중국에서는 석묵(石墨: 돌로 된 먹)이라고 불린다. 전시에서 흑(黑)은 작품의 첫 시작(初心)이자 근본을 추구하는 작가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흑·연(黑· 延)은 외연의 확장이자, 법고창신(法古創新)과 같이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깨달음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신(神) 중심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자아’ 속에서 극복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인간의 확장성을 한계에의 극복’으로 보았다. 니체의 초인(超人)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추구하며,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다. 작가를 니체의 초인에 비유했을 때, 이들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그 어떤 두려움도 예술로 이겨내는 자유로운 존재이자, 인생을 온전히 작품에 던져넣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최병소(1943~ ) 작가는 동시대 사건의 집합체인 신문을 ‘지우고 채우는’ 작업을 통해 자기 흔적(uniqueness)을 부여한다. 흑연으로 선을 그어 동시대 서사를 지워나가는 행위는 ‘신문이 가진 정보성(동시대 보편성)’을 작가의 개성으로 대체하는 ‘문명에의 저항’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최병소 스타일(Choi Byung-so's style)’은 실제 양식(Style)의 어원인 첨필(尖筆: stylus/ stilus: 필기용 철필)과도 연관되는데, 고대 로마에서 사용하던 ‘쇠로된 침 모양의 필기구인 스틸루스(stilus, m.)’를 활용한 ‘원형으로의 복귀’로도 해석된다. 첨필로 표현된 글은 일종의 문체(文體)이자 삶의 방식이므로, 작가는 신문이라는 보편 서사를 지우고 ‘자기만의 행위적 문체’를 획득함으로써 선에서 스타일을 찾는다. 신문지와 연필 외에도 테이프, 옷걸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최병소의 작품들은 일상과 예술의 밀착형 언어이자, ‘비주류의 복귀’라는 측면에서 예술정신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졸업 후 고향 대구로 내려가 작업을 이어간 최병소가 2011년 대구미술관 개관 특별전을 계기로 주류화단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우고 채우는 가운데 의미를 찾는 허실상생(虛實相生)의 동적 기세(氣勢)라고도 해석 가능하다.

김은주(1965~) 작가는 연필 본연의 물성(物性)인 흑(黑)에 변화무쌍한 에너지를 부여하는 ‘검은 연금술(Black alchemy)’을 창출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검은 향연은 꽃과 바람 등이 흐르듯 이어지는 ‘flow/흐름(流)의 미학’을 창출하면서, 흑연의 묵직함을 잊게 만드는 연기(緣氣-인연의 기운)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흑연에서 출발한 실체(實體)로의 도전은 나무뿌리나 바위 등(等)에 의지한 채 뻗어 올라가는 덩굴처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자기 발견’의 길과 닿아 있다. 작가에게 작품은 ‘나-너-우리’를 연결하는 기표(記標)이자, 사회가 정해놓은 고정가치를 초월하는 ‘격동의 행위’이다. 이는 인간다움을 흑(黑)에서 찾고, 수많은 선의 변이와 변형 속에서 찰나(刹那)를 발견하는 깨달음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향연(饗筵, Symposion)이 ‘사랑(에로스)-좋음’에 대한 형이상적 서사이듯이, 작가에게 검은 향연(黑· 延)이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한 긍정적 예술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윤상렬(1970~) 작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가상과 현상 세계’의 결합을 통해 ‘사이의 관계’를 발견한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의 역사에도 오랜 문명들이 머물러 있는 것처럼, 중첩된 선의 레이어들은 시·공간을 함축한 ‘검은 언어’ 속에서 셀 수 없는 감성색(感性色)을 머금는다. ‘작고 큰 선 사이, 굵고 가는 선 사이’에서 작가는 ‘한계 없이 낯선 무아(無我)의 행위’를 발견한다. 번득이는 섬광과 같은 ‘깨달음의 선(線)’은 ‘최상의 선(善)’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과 같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파장의 진폭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무(巫)의 경지처럼,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작가는 침묵함으로써 비로소 제 목소리를 드러낸다. 이른바 관념적 선긋기, 작가는 이를 작가노트(2024)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의 일은 그리지 않지만 무언가를 남기는 과정…. 선택과 집중 그리고 쓸고 닦고 정리하며 나타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아날로그적 선 긋기와 디지털 선긋기를 결합한 ‘사이와의 대화’는 아크릴과 같은 투명한 구조체와 만나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을 갖는다. 작가에게 흑연(黑·延)은 무행(無行) 속에서 무언가를 남기는 ‘깨달음의 퍼포먼스’가 아닐까 한다.

편대식(1984~) 작가는 시·공간의 좌표를 ‘긋는 행위’를 통해 기록한다. 무념무상의 시간을 ‘행위’로서 극복하는 듯하지만, 생각보다 작가의 시간은 공허하지 않다. 이전 작가들이 실천적 수행을 통해 ‘본질로의 회귀’를 꿈꿨다면, 편대식은 젊은 작가답게 ‘선들 사이’를 유영하며 ‘틈새의 뉘앙스’를 살핀다. 정해진 패턴의 반복은 수행적인 도(道)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벗어난 ‘非보편적 세계관’으로의 여행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플레이어(Player)라고 칭한다. “내게 있어 작업은 게임과 같다. 일정한 규칙을 설정하고 어렴풋이 기대하는 결과를 향해 가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세계로의 중독”이라는 것이다. ‘의도된 중독’은 현실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작가에게 흑(黑)은 불안감에서 출발한 가능성으로의 여정이자 ‘기쁨과 회의(懷疑)/두려움과 안도감’의 복합변주(Compound variation)라고 할 수 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