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xy Data: 수행의 기하학, 반복의 윤리학
편대식의 회화는 ‘시간을 물질화하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자신을 ‘플레이어(Player)’라 부른다. 게임의 규칙처럼 반복과 몰입의 루프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 안에서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Proxy Data》는 기후학의 대체자료 개념에서 차용된 용어지만, 여기서 그것은 직접 관측할 수 없는 시간의 감각을 유추하기 위한 회화적 장치로 변주된다. 색의 층위를 쌓고 갈아내는 행위, 연필로 표면을 지워내는 시도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감각의 물질화를 향한 실험이다. 그 표면은 시간의 퇴적층이며, 동시에 기억과 몰입의 현장이다. 작가가 말하는 ‘플레이어’와 ‘Proxy Data’는 서로 다른 세계의 규칙을 지닌 두 좌표다. 하나는 중독적 몰입의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데이터로서의 감각이다. 이 두 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편대식의 회화는 수행의 기하학으로, 그리고 실패의 윤리학으로 확장된다. 편대식의 세계에서 회화는 더이상 재현의 장르가 아니라 시간과 감각이 부딪히는 실험의 장이 아닐까.
수행의 기하학: 기록과 유추의 표면
도로테아 폰 한텔만(Dorothea von Hantelmann, 1969~)은 “예술은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세계 속에서 무언가를 행하게 한다”고 말한다. 편대식의 회화가 바로 그러하다. 작가의 작업은 그려진 이미지보다 그려지는 행위의 과정에 무게를 둔다. 색을 수집하고, 연필을 눌러 쌓고, 다시 갈아내며 남겨지는 물질의 흔적은 수행(performance) 그 자체다. 회화는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매번 다시 수행되는 현실 생산의 장이다. 그는 말한다. “시간을 물질로 환원하는 행위는 기록을 통한 감각적 경험의 추구다.” 이 기록은 단순한 복제나 저장이 아니다. 그 속에는 감각의 데이터가, 손끝의 시간 단위로 쌓인다. 마치 한 겹의 색이 지난 계절의 빛과 온도를 머금듯, 《Proxy Data》는 시각과 감각의 단면을 통해 ‘유추된 시간’을 시각화한다.
작업은 또한 ‘이미지의 소거’와 ‘물성의 귀환’을 반복한다. 연필의 광택, 퍼티의 결, 한지의 주름은 처음엔 제거 대상이었으나, 오히려 제거의 과정에서 다시 되돌아온다. 작가가 말하듯, “이미지의 귀환은 목적의 좌절이지만, 동시에 감각적으로 매력적인 실패의 결과값”이다. 이 실패는 조형적 결함이 아니라 감각의 재구성 과정이다. 베케트의 말처럼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미학이 여기서 구현된다. 그가 반복적으로 칠하고 갈아내는 행위는 수행과 중독의 경계에서 진행된다. 스스로 정한 규칙을 실행하며, 통제와 해방의 긴장 사이에서 회화의 리듬을 생산한다. 이러한 반복은 수행의 윤리이자 존재의 확인이다. 그는 수행(修行)이 아니라 수행(遂行)을 한다고 말한다. 완성을 향한 정화가 아니라, 실행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Proxy Data》의 색층은 대체자료처럼 ‘직접 관측 불가능한 시간’을 유추하게 한다. 색의 패턴은 더 이상 변하지 않는 화석이자, 동시에 과거와 현재의 흔적이 중첩된 생동하는 데이터이다. 회화는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감각의 단면을 적층하여 시간의 물질성을 실험한다. 이는 회화의 재현 개념을 확장하는 시도이며, 감각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행위이다. 결국 편대식의 회화는 ‘기록’과 ‘유추’ 사이의 표면에서 진동한다. 기록은 과거의 잔류이고, 유추는 감각의 미래이다. 그 두 흐름이 맞닿는 지점에서, 표면은 생명체처럼 호흡한다. 그의 검은 사각형은 더 이상 무(無)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감각의 스펙트럼이다. 그러한 표면 위에서 작가는 플레이어로서 끊임없이 규칙을 실행한다. 그 과정이야말로 수행의 기하학이며, 실패의 윤리이다.
실패의 윤리에서 감각의 생성으로
편대식의 세계에서 실패는 결핍이 아니라 생명력이다. 이미지를 지우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하고, 그 실패가 감각을 낳는다. 통제의 좌절이 오히려 회화의 생기를 회복시킨다. 이러한 미학은 “형식의 균열이 감각의 통로로 변환되는 순간”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의 회화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이 감각의 문을 연다. 아닐까. 작가의 철학은 명확하다. 현실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만, 그 탈주의 과정에서 오히려 현실의 구조를 직시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그에게 ‘도피’이자 ‘복귀’의 장소이다. 이제 그의 실험은 두 방향으로 확장될 것이다. 하나는 물질적 실험의 확장 - 퍼티, 페인트, 샌딩, 연필, 아크릴 등 매체 간의 충돌을 통한 새로운 표면의 탐구. 또 하나는 데이터적 사고의 심화 - 색·시간·감각의 로그를 축적하여 회화적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과정이다. 편대식의 수행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작가는 회화를 다시 쓰고, 실패를 갱신하며, 감각을 재정의한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만의 현실을 생산한다.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