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혁의 캔버스 위에는 2호, 4호, 8호 등의 작은 붓으로 스트로크가 반복된다. 하나의 스트로크는 분절된 시간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스트로크에 실리는 물감의 양만큼 그리고 그 물감이 마르는 시간만큼 화면에는 시간이 담긴다. 빨리 마르는 아크릴릭보다는 더디게 마르는 유채물감이 더 많은 시간을 담는다. 하나의 레이어가 완성되면 물감이 80%쯤 말랐을 때 그 위에 새로운 레이어의 붓질을 한다. 화면의 어떤 데서는 아래에 깔려 있는 채 마르지 않은 꾸덕꾸덕한 과거라는 시간의 층이 현재라는 시간의 층을 비집고 올라온다. 완전히 과거로 말라버린 시간과 그 위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시간, 과거로 완전히 마감하지 못하고 현재로 비집고 올라오는 시간 등 여러 시간의 층이 뒤섞여 있는 불균질한 화면이 나타난다. 여기까지는 붓질이 장소와 시간의 행위다.
그러나 그 붓질은 결국 무언가를 열기 위한 몸짓이다. 지겨울 정도로 단순한 반복적인 동작의 수직 수평의 붓질과 레이어가 거듭 얹힐수록 불균질했던 화면은 서서히 균질한 화면으로 전화한다. 어느 순간 조형의 임계점이 찾아온다. 그리고 공간이 열린다. 건축이 공간을 품듯 캔버스가 공간을 품는 순간이다. 신수혁의 페인팅에 대각(大覺)이 찾아온 순간이다.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는 카메라로는 건축 사진에서 포착 불가능의 공간을 담아내기 위해 초점거리 무한대 이상으로 렌즈를 당겼다. 초점은 무한을 뚫고 무한 앞으로 나아갔다. 소실점 너머의 인식의 세계에 초점이 도달해보니 지각의 화면은 오히려 멍해졌다.
스기모토가 무한대 이상의 촛점으로 렌즈를 당겨 공간에 도달하려 했다면, 신수혁은 반복적인 루틴의 붓질로 장소를 쓸어가며 공간을 드러내려 했다. 그리하여 신수혁의 화면은 극도로 담담한 경지에 이르렀다. 화업(畫業)은 허업(虛業)이다. 허업이 본령이라면 멍하거나 담담한 상태도 최고의 경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짧은 스트로크의 무한반복의 붓질은 형상을 위한 조형에 대한 의지라기보다는 수신(修身)에 더 가까운 행위다. 화가에게 붓은 반신체(半身體)다. 신체는 신(身 metaphysical body)과 체(體 physical body)로 되어 있다. 붓은 신이 될 수도 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화면 위에 물리적으로 얹히는 붓은 체의 붓이다. 체의 붓은 결코 공간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 체의 붓을 무화(無化)시켜 신의 붓만을 남겨야 한다. 이때 무화를 위한 체의 붓질은 무의미하고 단순하며 반복적일수록 좋다. 신수혁의 수직 수평의 짧은 스트로크의 붓질처럼. 필경 화면은 점점 더 담담해진다.
우리는 지각한다. 푸른 화면에서 시간이 점점 얹혀 가며 장소가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을.
그러고 우리는 인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身)의 붓이 인도하는 화면 속의 무한한 공간의 세계를. 깊고 현현(玄玄)한 그 세계를.
<임계점을 위한 무한반복의 스트로크 , 황인 > 평론 중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