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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그리고 잇다 White Colors Within

2026. 3. 26 - 4. 25

김미경 KIM MI KYUNG

흰, 그리고 잇다

접힘과 솟음 사이에서

처음에는 색층이 보인다. 겹겹이 쌓인 숫자와 기호들. 그러나 오래 서서 바라보면, 그 표면 너머에서 무언가 접히고 펼쳐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어린 날의 보자기와, 그 위에 쌓아 올린 돌탑의 침묵이 만나는 기억이다. 방 한구석에 포개어 두었던 어린 날의 보따리와, 산길 굽이마다 누군가 쌓아 올린 돌탑. 하나는 안으로 접히는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밖으로 솟는 바람이다. 작가의 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쌓아 올리는 행위와 연결하는 행위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작업.” 보따리는 감싸고, 접고, 숨긴다. 안으로 스며들며 내면을 만든다. 반대로 돌탑은 올리고, 드러내고, 버틴다. 바깥을 향해 서서 의지를 세운다. 김미경의 손은 늘 이 두 방향 사이를 오간다. 작가는 ‘안으로 접히는 보자기’와 ‘밖으로 솟는 돌탑’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한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단순한 시각적 병치를 넘어 내적 경험의 변증법을 펼쳐 보인다. 여기서 보자기는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유년의 보자기가 ‘슬픔과 고통, 싫어하는 마음’을 싸안는 감춤의 도구였다면, 인사동에서 마주한 조각보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 펼쳐짐의 대상이다. 동일한 대상이 경험의 층위에 따라 극단적으로 상반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지점에서, 작가의 내면은 모순을 품게 된다. 이 모순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며, 바로 여기서 시적 긴장이 발생한다.

작가가 색층을 쌓아 올리는 과정을 돌을 하나하나 쌓는 행위에 비유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시간의 누적, 정성의 축적, 의미의 중첩을 상징한다. 돌탑은 위로 솟아오르는 형상이지만, 그 기저에는 쌓아 올린 자의 오랜 응시와 반복된 행위가 자리한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보자기와 돌탑이 만나는 과정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순적이었던 것은 보자기에 대한 나의 감정이었다.” 이 고백은 작업의 핵심을 관통한다. 작품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화해는 두 이미지 사이의 조화가 아니라, 작가 내면에 존재했던 모순적 감정들이 ‘묘한 고요’ 속에서 통합되는 과정이다. 그 만남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순을 품은 채 서로를 받아들이며 서서히 완성된다. 작가의 노트에 반복되는 “펼치다, 다듬다, 연결하다, 쌓아 올리다” 같은 동사들은 그의 작업이 사유 이전에 손의 리듬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보자기가 상처와 기억을 수평으로 펴서 잇는다면, 돌탑은 흩어진 사연들을 수직으로 밀어 올려 하나의 기도를 세운다. 두 축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작품은 조금씩 자라난다. 화해하지 못한 것들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태어난다. 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 끝에 한 몸이 되어가는 과정, 어쩌면 김미경의 ‘작업’은 바로 그 느린 성장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흰구름에의 비유

이 대목에서 인도의 사상가 오쇼(Osho, 1931-1990)의 사유는 하나의 은유로 조용히 스며든다. 오쇼는 『나의 길, 흰구름의 길』(My Way: The Way of the White Clouds, 1974)에서 흰구름을 “따로 가야 할 길이 없는 것”으로 말한다. 흰구름은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다. 그저 떠가고 흐르며, 흐르는 그 순간에 자기 길을 만든다. 김미경의 화면 위에 층층이 쌓이는 숫자들, 1·2·3 그리고 C, N, H, O도 그러하다. 그것은 결론을 향한 계산의 부호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시간과 호흡이 남긴 흔적이다. 동시에 존재가 자기 자신을 더듬어 가는 명상적 필적과도 닮아 있다. 이 숫자와 기호들이 처음부터 거대한 우주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먼저, 자식 셋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자 한 간절한 몸짓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고 오래 써 내려가는 동안, 그 표식들은 한 사람의 생을 헤아리는 단위를 넘어 생명의 근원과 물질의 질서를 더듬는 표기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화면 위의 그리드는 계산의 격자가 아니라, 고통과 고통, 마음과 마음, 세포와 우주를 이어 붙이는 단위가 된다. 오쇼가 『도: 삼보, 4권』(Tao: The Three Treasures, Vol. 4, 1975)에서 삶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내는 신비”라고 말한 대목은, 이러한 전환을 비추는 빛처럼 읽힌다. 김미경의 작업은 무엇을 설명하거나 해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끝내 품고 살아낼 것인가를 묻는다. 그래서 작가가 숫자를 “퍼포먼스 하듯” 써 내려갈 때, 그것은 단순한 반복 노동이 아니다. 보는 행위와 쓰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이다. 앞서 언급한 『나의 길, 흰구름의 길』에서 오쇼가 말한 ‘지켜보는 자’의 의미는 이 작업의 리듬과도 맞닿아 있다. 손은 쉼 없이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의 깊은 곳에는 자신을 한 걸음 물려 바라보는 침묵이 있다. 그러므로 김미경의 화면은 빽빽하면서도 고요하고, 충만하면서도 비어 있다. 그 위에 쌓이는 것은 단지 숫자와 기호만이 아니다. 바라봄의 시간, 견딤의 시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넘어가고자 하는 미세한 수행의 시간이 함께 새겨진다.

잇다, 그리고 흰

영국 스톤헨지 앞에서 작가는 선사와 현재가 한 장면처럼 포개지는 감각을 경험한다. 산길에서 보던 크고 작은 돌탑들은 그 순간 인류의 오래된 손들과 이어지고, 어린 시절 목이 꺾이도록 올려다보던 곧은 나무는 알 수 없는 경외와 신비의 형상으로 되살아난다. 돌, 나무, 탑, 문명, 기억. 그것들은 김미경의 작업 안에서 서로 다른 시대의 사물이라기보다,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 취한 여러 얼굴에 가깝다. 인간은 왜 쌓는가. 왜 세우는가. 왜 남기고, 왜 잇는가. 작가의 시선은 늘 그 근원적인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늘 ‘흰’이 있다. 김미경에게 흰은 단순한 색이 아니다. 그것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끝까지 받아들이는 바탕이며, 절제와 담백함, 수수함이 머무는 자리다. 백자의 흰, 모시의 흰, 한복의 흰, 한지를 통과한 햇빛의 흰, 대지를 덮는 눈의 흰이 그녀 안에서 겹겹이 포개진다. 이 흰은 여리지만 약하지 않고, 담백하지만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상처와 슬픔, 시간과 기억까지 모두 품고도 끝내 제 빛을 잃지 않는 힘에 가깝다. 그러하기에 화면 위에 수많은 색이 겹쳐져도 김미경의 작업에서 흰은 사라지지 않는다. 흰은 가장 뒤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색을 가능하게 한다. 말하자면 흰은 시작이면서 도착이고, 여백이면서 밀도다. 모든 색이 흰의 바탕 위에서 태어나 다시 그 지평을 향해 스며들 듯, 작가의 화면 또한 수많은 층위를 지나 마침내 하나의 고요한 밝음에 닿으려 한다.

결국 김미경의 작업은 우리 자신과 세계, 그리고 우리가 속한 우주를 조금씩 이어 맞추어 가는 과정이다. 접히고, 펴지고, 쌓이고, 흩어지는 시간을 통과하며 비로소 모습을 얻는다. 수직과 수평, 내면과 외부, 기억과 문명, 개인의 서사와 우주의 질서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오늘도 조각들을 잇고 또 잇는다. 모든 것을 품은 듯한 백색은 무한대의 지평을 열어 보이며, 절제와 담백함 속에서도 결코 단단함을 잃지 않는다. 백자를 빚어낸 도공들이 숙고와 상념의 시간을 견뎌냈듯, 작가 또한 수많은 색층을 쌓는 시간을 견뎌낸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인 자리에서 흰은 비로소 모든 색을 품은 빛으로 호흡한다. 흰 모시, 흰 한복, 한지를 스며드는 햇살, 대지를 뒤덮은 흰 눈까지. 백자에서 출발한 흰의 사색은 세상의 모든 흰으로 퍼져나가고, 그렇게 확장된 흰들은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 더욱 깊어진 지평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미경의 작업은 조용하지만 약하지 않다. 흰이 모든 색을 품었듯, 그 작업은 접힌 기억과 솟은 바람, 개인의 아픔과 우주의 질서를 함께 품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도 각자의 방식으로 흘러가며, 흩어진 조각들을 끝내 이어 붙일 수 있음을 오래,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안현정(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성균관대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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